人生知己의 세상만사
article thumbnail
반응형


주진우 기자가 말하는 제주 4.3 민중항쟁(4.3 항쟁은 양민학살 사건이다.)

1948년 제주도에서 벌어진 도민 학살사건의 진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면 맨 아래 추가된 오디오를 들어 보시길 권합니다.... 
4.3 항쟁을 공산 무장폭동으로 규정한 것은 전두환이 집권하던 시기였다는 사실을 주진우 기자는 밝히고 있다. 
정권찬탈을 목적으로 양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사건... 
그것은 5.18 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이전에 이미 4.3 이 있었다. 
4.3 항쟁의 희생자는 공식 집계된 희생자(사망자)만 14,028명이라고 발표되었다. 
비공식 집계에 의하면 4.3 항쟁에서의 제주도민 사망자 숫자가 3만명이 넘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이는 5.18의 희생자 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불과 2-30년 전만 해도 제주는 4월이면 마을마다 수십 가구에서 같은 날에 제사를 지냈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곡소리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4.3 제주도민 학살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으며, 오히려 4.3이 온전히 빨갱이들의 소행으로 알고 있는 국민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다. 
이래서 역사를 확실히 바로잡지 아니하면 100년 후에는 광주 민중항쟁도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역사책에 기록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잠시 왔다 갈 인생이라지만 그래도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은 너무 많다. 그러기에 뒤에 남을 아이들에게 그 진실을 넘겨 주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마지막 의무가 아닐까... 
출처 : 주진우의 현대사 시즌 2 [05화] - 하단 오디오 참고 바랍니다.

내가 보는 4.3항쟁의 발생원인. 
4.3 항쟁은 일본을 대신하여 한반도의 절반을 점령할 목적으로 진입한 미군과 그리고 진정한 해방을 기대한 민족 사이의 잘못된 만남으로부터 그 발생배경은 시작된다. 
일본을 대신할 새로운 통치자라는 생각을 갖고 들어왔던 미군과 미군을 해방군으로 여겼던 우리민족의 사이에는 너무나 큰 기대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이승만과 친일파들이 끼어 들었다. 아니 그 보다 미국이 그들을 선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신탁통치 서명식

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조선총독부 제1 회의실에서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운데)가 남한 주둔 미군사령관 존 하지(오른쪽) 중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통치 이양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사진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0808104605859   -   한겨레


우리 민족과 미군의 동상이몽 속에 산산이 부서진 해방에 대한 기대에 실망한 민족이 저항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미국은 일본을 이용하여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할 생각이었다. 
그러한 목적을 갖고 있던 미국에게 한반도의 공산화 방어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필요에 의하여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38선 이남에 대한 통치를 선택한 미 군정
당시 미 군정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패망한 일본을 대신하여 3.8선 이남에서 권력을 확보하는 것이 유리했던 국외 친일파 이승만 일당.. 
또한 해방 후의 남한에서 이승만이 정권을 잡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의 안위를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던 국내 친일파들

이런 미 군정과 친일파 이승만 일당이 3.8선 남쪽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사용한 방법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일본인 대신 미 군정의 통치를 받게 된 현실에) 친일파 이승만 정권과 미 군정에 저항하는 양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무차별적으로 학살, 진압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친일파와 이승만 일당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탄압할 수 있게 되는 그 이상한 일이 가능했던 좌, 우익이란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친미 즉, 이승만 일당에 우호적이면 우익... 그 나머지는 모두 좌익 뺠갱이로 취급받는 일이 벌어진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친일파 이승만 일당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승만의 상해 임시정부에서 행위들과, 하와이에서의 이승만의 행위를 익히 알고 있는 이라면 상해 임정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왜 이승만 일당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는지 굳이 설명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좌익으로 몰려 탄압을 당하게 된 것도 이때였다.  
36년간 억압받던 민족에게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들이 벌어짐에도 가만히 있었다면 어찌 3.1을 말할 수 있으며, 어찌 상하이 임시정부를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 분연히 저항하였고 제주에서도 그런 저항이 발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제주 양민들이 일으킨 4.3 항쟁은 그 당시 민족이 느꼈던 해방의 의미와 미 군정의 주둔목적과의 괴리로 인한 민족의 분노 이외에도 당시 제주의 여러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것들 중 대표적인 것이 제주에 대한 지배권을 장기간 행사하고 있었던 일본인들과 친일 경찰들이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제주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1947년 제주도의 3.1절 기념식장에서 기마경찰이 양민들을 상대로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발생으로 미군의 협조 하에 당시 제주를 사실상 통치하고 있던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분노가 1948년 4월 3일을 시작으로 제주 전지역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그렇게 시작된 사건이 바로 '제주 4.3 항쟁'이며, 6.25 전쟁이 끝난 1954년까지 이어졌다. 

당시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제주 도민들의 분노에 사과는커녕 오히려 군대와 경찰, 당시 북한 서북지역 출신 개신교인 중심의 서북청년단을 보내어 제주도의 수 많은 양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무참하게 학살하고 진압 하였다. 
남한에서 정권을 잡고자 했던 친일파 이승만 정권과 미 군정의 제주 도민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은 빨갱이 소탕을 빌미로 이후에도 1954년 까지 수년 간에 걸쳐 진행이 된다. 
 
4.3 초기를 주도했던 이들의 제주 남로당 관련성 때문에 아직까지도 정식 명칭이 정해지지 않고 있으나, 4.3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4.3 초기가 아닌 중기, 후기에서 이승만 정권의 군과 경찰이 제주 도민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지 볼 필요가 있다. 
국가 폭력에 의한 국민의 희생이 수반된 사건에 있어 그 사건의 원인이나 주동자 등만 따지고 전체적인 흐름이나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국가폭력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주에서 4.3이 발생하자 이승만 정권이 여수 14연대에게 진압을 명하였으나, 여수 14연대가 자국 국민에게 무력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며 사실상 진압명령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진다. 
지금까지 이를 국민들은 흔히 여순반란 사건으로 불렀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전리품이라고 한다. 
여순항쟁이 여순반란 사건으로 불리는 것은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이와 같이 4.3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대응방식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의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은 오히려 여수, 순천과 제주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제주 도민을 대부분 좌익 빨갱이로 몰아 무력진압을 밀어부침으로써 오히려 도민 전체적으로 저항이 확산되었고,  4.3의 희생자가 더욱 증가하게 된다. 
사실상 친일파 이승만 정권이 적극적으로 사태를 키운 측면이 크다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승만 정권의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경찰과 군 등의 무력 진압으로 인해 제주 전 지역에서 많은 양민들이 학살 당했는데 그 수가 전체적으로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3만 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제주도의 선량한 도민들에 대한 군과 경찰 등의 무력 진압과 이에 대한 제주 도민들의 저항 그리고 법과 원칙이 없는 상태에서 수 많은 양민들이 빨갱이나 좌익으로 몰려 학살당한 것을 고려하면 '제주 4.3 민중항쟁', 더 나가면 '제주 4.3 민중항쟁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학살사건'으로 불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해방 이후에도 일제시대 처럼 탄압을 받고, 억압을 받는 것에 저항하는 제주 양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짓밟은 이승만 정권과 미 군정.... 
4.3 항쟁이 일어난 제주 지역과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한 여수 14연대가 있던 여수, 순천 지역에 대한 계엄령 선포... 
독재에 저항하는 광주시민들을 빨갱이들로 몰아 무참히 학살한 전두환 군부와 당시 광주학살을 외면한 미국...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난 광주에 대한 계엄령 선포... 

오랜 세월의 차이를 건너뛰었지만 제주, 여수.순천 계엄령과 광주 계엄령....
너무나 닮은꼴이라는 사실은 매우 충격으로 다가온다. 

친일파 이승만 정권과 전두환 정권이 독재와 정권의 부당한 횡포에 저항하는 국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군대를 동원하여 학살했던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전두환 독재정권의 부역자들은 단 한번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인정이나 제대로 된 사과는커녕 오히려 지금도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부정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제주 4.3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 후 이승만은 1948년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라고 주진우의 현대사는 밝히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시민을 폭도와 빨갱이로 몰아 군대를 동원하여 학살하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의 경우와 매우 유사한 경우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해방을 하긴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조, 중, 동과 보수의 탈을 쓴 신 친일파들에 의한 빨갱이 프레임이 계속되는 해방정국을 보내고 있다.  
우리가 본 것은 우리의 해방이 아니라 일본의 패망이었을 뿐이다.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어떤 미사여구로 표현을 할지라도 속을 들여다보면 2차대전에서 일본을 패망시키고 승전의 대가로 아시아 지역에서의 미국의 세력유지를 위하여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남한에 대한 지배목적이 있을 뿐이다. 
1948년 8월 15일 일본 패망일로부터 정확히 7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여전히 미사일 제작, 전투기 제작, 심지어 미사일 시험발사조차도 미국의 간섭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 밖에도 연합사와 군 전시작전권 그리고 사실상 미 군함들의 휴식기지로 전락한 강정 해군기지만을 보더라도 지금도 미 군정이 지속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지금도 친일파들이 대한민국 기득권층 주류를 굳건하게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유한국당과 박근혜 정권이 해체한 세월호 특위와 70년 전 친일파와 이승만 정권이 해체한 반민특위....  
친일파 수구세력이 국민을 업신여기는 역사의 데자뷔를 보고 있는 것 같아 분노가 치민다...

미군은 미 군정이 집권하던 당시 제주 4.3항쟁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에 대하여 아직도 단한번도 사과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딱 하나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점령군이며 통치자라는 시각으로 대한민국을 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친일파들에 대한 청산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련 글]

자유한국당의 행태는 매우 일본스럽다.

양승태 사법부 - 조선일보 기사거래의 추악한 민낯

조, 중, 동 보고 있나....이것이 바로 국격이다.

과거 회귀가 불가능한 수준의 보훈처 개혁이 필요하다

이것은 국방부와 보훈처 실무자들의 의식수준의 문제다.

국민세금 받아 쳐먹고 일본 극우와 친일교류한 전직 장성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회장 현승종은 누구인가.

한국 보수 개신교의 추악한 실체

자유한국당의 정체성 논란...

반응형
profile

人生知己의 세상만사

@人生知己

포스팅이 좋았다면 "좋아요❤️" 또는 "구독👍🏻"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