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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 각론 - 해석 (종합)

영어 원문 : https://www.marquette.edu/maqom/Gospel%20of%20Thomas%20Lambdin.pd

 

도마복음 (Gospel of Thomas)

서문 : 이는 살아 있는 예수께서 이르시고, 쌍둥이 유다 도마(Didymos Judas Thomas)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이라.

 

서문은 도마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몇 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살아 있는 예수'라는 것은 예수 사후에 일부 사도들과 복음서 기자들에 의하여 신격화된 예수가 아니라 죽기 전의 살아 있는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말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도마복음이 성경 속에서 신격화된 예수가 아닌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말씀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1절에 나오는 '구절'은 영문으로는 sayings로 표기되는데 이를 말씀으로 번역하게 된다면 "그"를 예수가 아닌 도마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sayings를 (예수의) 말씀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이후 등장하는 모든 구절을 묶은 예수의 말씀을 통칭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이 경우 도마복음은 예수가 죽은 이후에 도마가 역사적 인간 예수가 하셨던 말씀들을 모아서 기록으로 남겼고, 누군가가 그 기록을 도마복음이라 이름을 붙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참고 - https://borrowingworld.tistory.com/1116 1절 하단부)

 

셋째, 서문 가장 첫 머리인 "이는" 부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 인간 예수가 하신 말씀을 도마가 정리했고, 그 자료들을 '도마의 복음'이라고 이름을 붙인 제 3자가 있었고, 1945년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것이 그 도마복음의 콥트어 판이라는 사실이다. 

 

1.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해석 - 1절은 도마복음을 해석해야만 하는 절대명제를 제시하고 있는 구절로써 역사적 인간 예수 말씀의 의미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자는 단 한순간도 시체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구절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영적인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섬을 통해 인지하게 되는 초현실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즉, 역사적 인간 예수가 추구했던 궁극적인 목표를 함축하고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1절의 은유 기법은 도마복음 곳곳에서 확인하게 되는데 유사한 예로 29절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는 상태" 등이 있다.

 

1절을 이해함에 있어 우리는 아래와 같이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1절에서 "그"는 도마보다는 예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후미의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는 부분이 85절과 111절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사용한 문구를 마치 자신이 처음 사용한 것처럼 도마가 1절에 박제를 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도마복음을 도마 자신이 기록하고 도마복음이라 이름을 붙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또는 1절에 나오는 '구절'이란 표현은 영문으로는 sayings로 표기되는데 이를 말씀으로 번역하게 된다면 "그"를 예수가 아닌 도마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sayings를 (예수의) 말씀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이후 등장하는 모든 구절을 묶은 예수의 말씀을 통칭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이 경우 도마복음은 예수가 죽은 이후에 도마가 역사적 인간 예수가 하셨던 말씀들을 모아서 기록으로 남겼고, 누군가가 그 기록을 도마복음이라 이름을 붙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서문과 1절을 동시에 놓고 보면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 

 

2. 예수가 말하기를, "구하는 자들은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찾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우리라. 고통스러울 때에 그는 경이로우리라. 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해석 - 2절의 "고통스러움"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천국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들이 진리나 진실이 아니었음을 깨달음으로써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2절에서 예수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현재 성경의 구약이 된 유대교의 당시 경전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당시 역사적 인간 예수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바탕 위에서 예수는 2절을 통하여 두 가지를 전달하고 있다.

첫째, 하늘나라는 죽음 후에 맞게 되는 천국의 개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 임을 암시하고 있다.

둘째, 예수가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탐구의 결과물로써의 최종 단계를 '내가 (나 자신을 다스리는) 나의 왕이 되는 것'이라 하고 있다. 

 

3.예수가 말하기를, "너희를 이끈다 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 보라! 나라가 하늘에 있도다 ' 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그들이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 나라는 바다속에 있도다 ' 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

 

해석 - 3절은 51절과 113절로 연결된다. 

3절에 등장하는 "나라" "천국"을 영문 도마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kingdom"으로 표기되고 있다.

kingdom을 한글로 번역하면 "나라"이외에 "왕국" 혹은 "세상"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기독교는 이를 천국으로 조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 등장하는 도마복음 구절들을 통하여 3절에서의 "나라" 혹은 "왕국"은 "깨달음(득도, 열반, 해탈)을 통해서만 인지할 수 있는 영혼(정신)의 영역"을 의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3절을 통하여 실제로 예수가 말했던 나라(왕국, 천국)는 외형적, 장소적 차원의 왕국이 아니라 내면적(정신적) 차원으로서의 영혼(빛)의 영역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10절, 11절, 50, 57절과 관련 있음).

또한 예수가 도마복음에서 강조한 천국이나 나라는 이를테면 현대 기독교의 교리나 다름 없이 되어버린 천국론 즉, '교회에 자신이 가진 것들을 갖다 바침으로써 그 대가로 얻게 될 것으로 기대하게 되는 미래에 예정된 입장티켓'과 같은 성격의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 부분은 109절과도 많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3절의 '나라' '천국'을 더 확장하면 29절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는 상태"로 표현할 수도 있다.

또한 이 부분은 뒤에 81, 83절에서도 연결되고 있다.

역사적 인간 예수는 유대인들이 믿는 장소적 개념의 천국을 부정했다.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이 따르던 율법에 저항하는 새로운 천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역사적으로는 당시 갈릴리와 유다 지방을 로마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마복음 전체적으로 3절은 도마복음의 근간, 뿌리, 규범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중요한 구절이다.

 

추가적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3절의 "살아 계신 아버지"이란 문구를 주의 깊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과는 구별해야 한다는 의미다.

왜 그런가는 예수가 당시 유대인의 율법에 저항하고 있었으며, 당시 예수가 천국운동을 전개할 때 종교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가 잘 드러난다.

예수가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도반들에게 현실적으로,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상태에서 끊임없는 탐구를 지속함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상태, 즉 해탈과 같은 정신적인 깨우침을 얻는 데 있다.

 

또한 3절에 등장하는 살아 계신 아버지는 50절에 등장하는 "빛"이라 표현할 수도 있다. 그 빛은 내면에 존재하는 영혼의 빛 그리고 외면에 존재하는 만물의 형체를 드러나게 하며, 그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빛을 동시에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줄에서 예수는 자신의 내면과 밖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천국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을 매우 안타까운 심정으로 빈곤 중에 살아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4. 예수가 말하기를, "나이 많은 이는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부탁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는) 똑같이 한 모습이 될 그들과 끝이 있는 인생의 시작점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해석 - 4절은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추구했던 천국론과 생명의 의미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4절은 결국 인간이 자신의 시간을 다 쓴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던 예수가 삶을 처음 살아내기 시작하는 시점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알려주고자 하는 심정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칠일 갓난 작은 아이'라 함은 현실적으로 보면 당시 유대인이라면 태어난 후 8일째 되는 날에 누구나 받아야 하는 할례 의식을 아직 치르기 전의 존재, 즉 유대 율법에 오염되지 않은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상징적으로 보면 칠일 갓난 작은 아이는 7절에 나오는 사람이 먹어 삼켜 사람이 된 사자로 비유될 수 있다.

7절에 등장하는 '사람이 먹어 삼켜 사람이 된 사자'는 물욕, 권력욕, 성욕을 극복한 존재이거나 혹은 이와같은 인간의 본질적 욕망을 느끼기 이전의 존재 즉, 타락하지 않은 순수한 상태의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예수는 이와 같이 순수한 영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살아낼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56절에 등장하는 시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체와 같은 삶에 관하여는 도마복음 곳곳에서 예수가 이에 관하여 다시 언급하고 있다)

 

5. 예수가 말하기를, " 네 (얼굴) 눈 앞에 있는 것을 먼저 알라. 그리하면 너로부터 감추어져 있는 것이 다 너에게 드러나리라. 감추인 것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해석 - 5절은 천국운동을 하는 도반(제자)들에게 가해질 박해의 공포에 당당히 맞서도록 하기 위하여 도반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또한 5절은 '나라는 죽음 후에 가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의 안과 밖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진리는 숨겨지지 않고 결국 드러나게 된다는 필연성을 선포하는 맥락에서 쓰여진 구절이다.

나라가 사람들의 안과 밖에 이미 와 있으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 도마복음 3절에 이미 나와 있다.

 

6.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여쭈어 가로되, "우리가 금식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오리이까? 구제는 해야 하오리이까? 음식 금기는 무엇을 지켜야 하오리이까?"

예수가 말하기를,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지말라. 그리고 너희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말라. 모든 것은 하늘 앞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감추인 것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고, 덮힌 것은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라."

 

해석 - 6절에서의 예수는 도반들에게 위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다. 즉, 예수는 진실은 숨길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위선을 숨기기 위하여 마음에 없는 기도, 금식을 형식적으로 하는 것들이 의미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매우 엄격한 형식적 율법을 강조하는 유대교 또는 이와 관련된 것들을 예수가 부정하는 모습이 도마복음 여러 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7. 예수가 말하기를, "사람에게 먹힘으로써 사람이 된 사자는 복이 있고,

사자에게 잡아먹힌 사람과 사람을 잡아먹은 사자는 저주받을 것이다"

 

해석 -

인간 내면에 내재해 있는 두 가지의 성질...

'동물적 욕망과 관련 있는 동물적 성질,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인간의 본질적 성질.

7절은 이 두 가지의 성질 사이에서 인간이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설명하는 구절이다.

구체적으로 첫번째 줄은 인간의 본성에 의하여 동물적 욕구가 억제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두번째 줄은 동물적 욕망이 인간의 본성을 이김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을 묘사하고 있다.

 

8. 그리고 예수가 말하기를,"사람 된 자는 슬기로운 어부와도 같다.

그는 그의 그물을 바다에 던져 작은 고기가 가득 찬 채로 바다로부터 끌어올리는도다.

그 가득한 고기 가운데서 슬기로운 어부는 잘생긴 큰 고기 한 마리를 발견하는도다.

그는 모든 작은 고기를 다시 바닷속으로 던져 버린다.

그리고 어려움 없이 그 큰 고기 한 마리를 가려 얻는다.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

 

해석 -

8절의 핵심은 한 마디로 요약해서 '선택과 집중'이다.

8절은 삶에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에 집중하고 사소한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구체적으로 '큰 물고기'는 영적인 통찰력 또는 깨달음과 같이 삶 전부를 주고 얻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한 비유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내용이 등장하는 마태복음 13장 47절에서 50절을 보면 도마복음 8절과 달리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것으로 변질되어 있다.

 

9. 예수가 말하기를,"보라!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러) 나갔다.

한 줌의 씨를 손에 가득 쥐고 그것을 뿌렸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 버렸고,

더러는 바위위에 떨어지매 땅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이삭을 내지 못했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기운을 막았고 벌레가 삼켜버렸다.

그리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그것은 좋은 열매를 내었다.

그것은 육십 배, 그리고 백이십 배의 결실이 되었느니라."

 

해석 -

본문에서 씨 뿌리는 자가 뿌렸다는 "씨앗"은 예수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새, 바위, 가시, 벌레, 좋은 토양 등 여러 가지 비유가 등장하는 9절은 예수의 가르침의 효과가 듣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고 가리키는 구절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새, 바위, 가시, 벌레, 좋은 토양 등은 제자와 청중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정도 혹은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나 진정성 등을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명사화한 것으로 보인다.

즉, 9절은 열린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자신들의 삶이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9절을 통하여 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던 시기의 역사적 인간 예수가 자신의 설교로 인하여 많은 괴롭힘을 받았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기독교와 현대의 복음서가 얼마나 변질되어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9절에 등장하는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서,

씨를 선의 관점으로, 새와 바위 그리고 가시와 벌레를 악의 관점으로 본다면 역사적 인간 예수는 선과악은 항상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 존재로 보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는 선과악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현재 기독교가 추구하는 선악의 관점과는 매우 다른 것으로써 시사하는 바가 많다.

 

10. 예수가 말하기를, "나는 이 세상에 불을 던졌노라.

그리고 보라! 나는 그 불이 활활 타오를 때까지 그 불을 지키노라."

 

해석 -

9절에서 예수의 가르침이 씨앗에 비유되었던 것처럼 10절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이 불에 비유되고 있다.

10절에서 예수가 세상에 던졌다는 "불"은 그의 영적인 가르침이나 메시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는 영적인 불꽃이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때까지 불꽃이 꺼지거나 꺼지지 않도록 보호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추종자들이 스스로 빛을 발산할 때까지 예수가 추종자들을 보호할 것임을 의미한다.

'불'은 82절에도 인용되고 있다.

 

10절을 통하여 우리가 진정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와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심판의 날에 모두가 불에 타 죽을 것이다"라는 목사들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일 수 있다는 점이다.

 

11. 예수가 말하기를 "이 하늘도 사라지리라. 그리고 이 하늘 위에 있는 저 하늘도 사라지리라.

죽은 자들은 살아있지 아니하다. 그리고 살아 있는 자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죽은 것을 먹던 그 날에는 너희는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도다.

너희가 빛 속에 거하게 되었을 때는 과연 너희는무엇을 할 것이냐?

너희가 하나였던 바로 그 날에 너희는 둘이 되었도다.

그러나 너희가 둘이 되었을 때 과연 너희는무엇을 할 것이냐?"

 

해석 -

첫째 줄, 하늘, 육체가 보는 물리적 세계의 하늘, 자아가 보는 영적 세계의 하늘, 모두 사라질 것, 물질적 존재의 무상함을 표현.

둘째 줄, 육체가 죽은 자들은 자신을 영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으나, 살아 있는 자들은 영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기회가 있다.

셋째 줄, 영적인 깨달음, 영적인 변화, 자아성찰과 같은 내적인 변화의 과정을 통해 깨달음이 없던 이전 상태 상태에서 내적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넷째 줄,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의 육체 중심의 유아기를 벗어나 자아가 형성되면서 인간이 자아가 느끼는 내적 갈등의 상황에서의 선택문제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다.

 

예수는 11절에서 육체와 자아가 동시에 존재하는 영역의 본질을 물리적 세계의 일시적인 본질과 영적 세계의 영원한 본질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11절은 현실에 대한 더 깊고 신비로운 이해, 즉 물리적 세계는 일시적이며 환상이고, 존재의 진정한 본질은 의식 혹은 자아에 더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12. 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이 언젠가 우리를 떠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지도자가 되겠습니까?"

예수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어느 곳에 있든지, 너희는 의로운 자 야고보에게 갈 것이다. 그를 위하여 하늘과 땅이 생겨났다."

 

해석 - "의로운 야고보"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특히 경건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지도자라는 그의 명성을 나타내기 위해 예수의 형제로 알려진 야고보에게 주어진 칭호라고 본다면..

이는 12절이 누군가에 의하여 작위적으로 추가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야고보는 경건하고 유대 율법을 고수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젓으로 전해지는데...

도마복음에서의 예수는 유대 율법을 철저히 배척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음에 비추얼 볼 때에 12절에서 예수는 어찌하여 유대율법을 고수했다는 야고보를 제자들에게 지도자라고 말한 것일까...

12절이 과연 역사적 인간 예수가 살아 있을 당시에 예수의 육성에 의하여 세상에 등장한 것인지 더욱 의심을 갖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기독교와 성경은 예수가 죽기 전 그가 누렸던 화려한 명성을 예수가 죽은 후에도 사실상 이어 가려는 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종교인 반면, 도마복음은 살아 있는 예수의 말씀을 기록한 기록물이다.

그런데 약 2천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도마복음을 해석함에 있어 막힐 때마다 성경과 관련된 사례들을 가져오거나, 혹은 예수를 성경이 주장하는 신의 아들, 혹은 신과 동일시한 존재임을 전제로 해석하려는 경향은 12절을 본래 예수가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를 왜곡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매우 우려가 되는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12절은 해석의 문제다. 도마복음은 현대가 아닌 2천 년 전으로 돌아가 예수가 했던 말들의 의미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직역을 해서는 절대 제대로 해석이 될 수가 있다.

도마복음 영문번역 12절을 보면 "go"라는 부분이 등장한다. go와 관련된 영어 숙어를 보면 단지 "간다"라는 의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go라는 단어는 "항상 선택하는" "뭐뭐 할 것이다" "늘 찾는" 이런 의미에서도 쓰인다.

왜 이것을 언급하는가 하면 12절을 해석함에 있어 go를 단지 누구누구에게 간다는 부분만으로 해석을 하려 해선 12절의 해석이 엉뚱하게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12절에서 예수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단순명사적인 그 무엇이라면, 12절에서의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문하고자 했던 것은 "진짜 중요한 것은 차기 리더를 정하는 것이 아닌 살아 있는 자들이 이루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추구해야 할 무엇인가를 강조한 것일 것이다.

그것은 도마복음 전체를 아울러 예수가 계속 강조하는 부분과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2절 후미에 등장하는 "그를 위하여 하늘과 땅이 생겨났느니라" 하는 부분도 54절에 등장하는 "하늘나라가 가난한 자의 것"이라는 부분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본다.

 

13. 예수가 그의 따르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무엇엔가 비교해 보아라. 그리고 내가 무엇과 같은지 말해 보라.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 당신은 의로운 천사 같나이다."

마태가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현명한 철학자 같나이다.”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스승님이시여! 제 입은 지금 당신이 무엇과 같은지 전혀 언표(言表)할 수 없나이다."

예수가 말하기를, "나는 그대의 스승도 아니로라.

그대는 내가 보살펴온,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광천 샘으로부터 직접 많이 마셨기에 취하였도다."

그리고 예수께서 도마만을 데리고 은밀한 곳으로 가시 었다. 그리고 도마에게 세 마디 말씀을 전하였다.

도마가 그의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을 때에, 그들이 도마에게 물었다: "예수께서 너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뇨?"

도마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가 예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 중 하나만 너희에게 이야기해도, 너희들은 돌을 주워 나를 쳐 죽이려고 할 것이다. 그리하면 너희 손에 있는 그 돌로부터 불길이 솟아 너희들을 삼켜버릴 것이다."

 

해석 -

다섯 번째 줄은 토마스가 자신의 잣대로 측정한 "거품이 이는 샘"에 취해 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예수가 토마스와 공유 한 영적 통찰력과 가르침에 대한 비유다.

마지막 줄의 토마스가 언급한 "불"은 분노가 내포된 힘이나 영적 계시가 변화시키는 힘을 나타낼 수 있다.

끝부분의 토마스의 대답 부분은 예수가 토마스에게 말한 것을 그가 동료들에게 공유할 때 동료들이 가질 것으로 예상되는 강렬한 감정적 반응에 대한 은유에 해당한다.

그것은 또한 토마스가 그의 동료들이 예수 그에게 전해 준 지식을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믿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구절은 영적 진리를 표현하는 어려움과 다른 사람들이 쉽게 납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개인적인 영적 경험의 필요성에 대한 비유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영적 통찰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영적인 통찰을 나눌 때 사람들이 직면할 수 있는 잠재적인 저항이나 적대감을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

 

그리고 도마복음 13절을 이해함에 있어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부분들을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첫째, 이번 주제는 도마복음이나 마태복음의 기초가 되었다는 마가복음 모두에 등장하는 내용인데 당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입을 빌리면 예수가 살아서 주로 활동하던 지역에서 예수가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당시 예수가 어떤 인물인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거나 통일된 표현이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도마복음 원문과 현재 성경을 비교하면 성경 속의 죽은 예수가 갑자기 "그리스도"이니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 둔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마가복음에 없던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이 마태복음에 새롭게 등장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마태복음이 마가복음을 뛰어넘는 소설임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당시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이었다면 마가복음에도 당연히 그 부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세주"와 "하나님의 아들"은 분명 매우 다른 의미다.

 

둘째, 마가복음 8장 29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자 예수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예수가 왜 그런 경고를 했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의문을 당연히 가져야 합리적다.

성경 속 예수는 온 세계를 구원하러 온 구세주로 표현되고 있는데 당시 예수는 어째서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

성경은 예수의 죽음을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것이라 해왔는데 정작 예수는 자신을 숨기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자신이 진정 구세주(그리스도)였다면 그리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을 정도의 강단을 가진 자였다면 세상 두려울 것이 없고 숨길 것이 없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야 정상일 것이다.

 

1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금식(禁食)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自招)하리라.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定罪)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구제(救濟)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에 해악(害惡)을 끼치리라.

너희가 어느 땅에 가든지, 한 시골 동네를 거닐게 될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면,

그들이 대접하는 음식을 그대로 먹으라,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病者)를 고쳐주어라.

너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희를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너희를 더럽히는 것은 너희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라."

 

해석 - 

14절은 일반적인 종교적 관점과 유대교라는 특정 종교적 관점 두 방향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우선적으로 일반적인 종교적 관점에서 14절을 바라보았을 때

특히 14절에서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은 세 번째, 네 번째 단락으로써 자신에게 이롭도록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존경 혹은 호감을 얻기 위하여 자선을 베푸는 것은 영적인 깨달음을 구하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베풀도록 가르치고 있다.

또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금식이나 기도가 아닌 선행 그리고 친절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데 집중하도록 권하고 있으며,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는 올바른 말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다.

14절은 결론적으로 영적 순결을 어떤 것을 통해 구할 것인지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구절이라 할 것이다. 예수는 이를 올바른 행동과 말에서 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인 종교적 관점이 아닌 유대교의 당시 성경이었던 지금의 구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방향에서 접근한다면 14절은 앞에서 보았던 6절의 업그레이드판이라 할 수 있다.

14절은 당시 유대인들의 경전인 토라에 대한 역사적 인간 예수의 배척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매우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구절 중 하나다.

14절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는 당시 유대교인들의 위선적이고, 구약에 바탕을 둔 세계관을 매우 싫어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인간 예수가 극도로 배척했던 유대교의 경전이 그가 죽은 후 그를 신으로 만든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성경의 절반을 차지해 왔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역사적 인간 예수가 현재 구약성경이 되어 있는 당시 유대교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조작과 새빨간 허구로 범벅이 되어 있는 기독교 성경의 민낯을 새롭게 직시하게 된다.

 

15. 예수가 말하기를,"너희가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를 볼 때에는 너희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하라. 그 이가 곧 너희 아버지니라."

 

해석 - 

15절은 18절과 그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구절이다.

15절과 18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경우를 "반어적 문장"이 활용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15절은 영적인 깨달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것에 대하여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적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자를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또한 15절은 예수 자신 역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음을 암시함과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육체가 아닌 영적인 깨달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것에 대하여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15절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경험의 영역을 넘어 영적 진리를 찾도록 노력하게 하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마가복음이나 요한복음에는 없으며, 이후에 증보판 작가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부터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역사적 증거를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15절과 같은 부분들을 통해서도 인간인 예수를 본격적으로 신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부터 시작되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 마태, 누가 이전의 바울 역시 동정녀 마리아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15절 후미에 등장하는 '아버지'라는 표현은 영적인 깨달음의 경지에 오름으로써 평범한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은 초월적 존재를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현대인들은 영적으로 상당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인물들을 '4대 성인'이라 칭하며  존경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4대 성인 역시 역사적으로 분명히 존재했던 인간이지 신이 아니다.

인간 내면에 감춰진 영적인 깨달음을 통해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고 신이 된다? 이치에 맞지 않다.

단, 성인의 반열에 오른 예수라는 훌륭한 인물을 주제로 애초에는 가르침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드라마 각본과 같은 것들이 종교권력의 지휘와 비호하에 2천 년에 걸쳐 수많은 수정에 수정을 거치면서 그 각본이 하나의 경전으로 포장되고 신은 아니지만 그를 신격화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경우를 사기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렇듯이 15절을 통하여 예수는 자신이 신이 아닌 평범한 인간임을 스스로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도마복음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자기 과시형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만약 신이었다면 15절과 같은 말씀을 할 이유가 더더욱 없는 것이다.

 

16. 예수가 말하기를,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던지러 온 줄로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 땅 위에 충돌을 던지러 온 줄을 알지 못한다, 불과 칼과 싸움을 선사하노라.

한집에 다섯이 있게 될 때, 셋은 둘에, 둘은 셋에, 아비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비에게 대항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서게 되리라"

 

해석 - 

16절은 제자들이 어려운 선택을 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반대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가 분열적이고 갈등을 일으킬 것이라는 은유적 표현 방법이다.

심지어 가정 내에서도 예수의 가르침이 의견 충돌과 분쟁을 일으킬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17. 예수가 말하기를, "나는 너희에게 여태 눈이 보지 못한 것, 귀가 듣지 못한 것, 손이 만지지 못한 것,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아니한 것을 주리라."

 

해석 - 

모든 도마복음의 해석도 그러하지만 우리는 17절을 이해함에 있어 역사적 인간 예수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상대로 설교를 하던 그 당시를 바탕에 두고 17절을 대하는 것이 우선이다.

17절은 당시 틀에 박힌 유대 율법(지금의 구약성경 부분에 해당)의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알려줄 것임을 선언하고 있는 구절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 예수는 인간이 살아 있는 육신의 몸이 그 생을 다하기 전에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설파할 것임을 선언하고 있는 구절이다

 

17절과 관련하여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2장 9절이 도마복음 17절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도마복음을 인용했다는 것은 당시 도마복음이 이미 수준 높은 정론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17절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도마복음을 기준으로 볼 때 기존 성서들이 도마복음 17절과는 시점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차이는 도마복음 17절은 말씀의 시점이 미래지향적이지만 성서의 유사 구절들, 특히 마태복음 13장 17절의 경우 이미 완성된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마태복음 13장 17절은 은연중에 예수 자신이 선지자나 의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존재임을 부각하려 하고 있다.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본성에 매우 어긋나는 부분이다.

 

18. 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가로되,"우리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옵소서."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니라.

시작에 서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이야말로 종말을 알 것이니,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해석 - 

18절은 인생의 본질 즉, 영적인 깨달음을 얻은 자가 누리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구절이다.

15절의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육체가 아닌 영적인 깨달의 경지에 오름으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시작점에 있는 자를 축복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는 죽음의 의미를 알 것이므로 죽음 역시 두려워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19. 예수가 말하기를,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한 자여, 복되도다.

너희가 나의 따르는 자들이 되어 내 말을 듣는다면, 이 돌들도 너희를 섬기게 되리라.

왜냐하면 너희를 위하여 파라다이스에 다섯 그루의 나무가 준비되어 있나니,

그 나무는 여름과 겨울에 따라 변하지도 아니하며, 그 잎사귀는 떨어지지도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 나무들을 아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

 

해석 - 

19절의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한 자'는 영적인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자를 의미한다.

'나무'는 영적인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섰을 때 받아들이게 되는 불변의 진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8절에 이어 인생의 본질인 영적인 깨달음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

도마복음을 해석함에 있어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은 당시 살아 있는 인간 예수가 제자들 혹은 청중을 대상으로 설교를 할 때에 과연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예수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진 것들을 전달하려고 하였을까 하는 부분이다.

도마복음을 해석함에 있어 너무 어렵게 접근한다면 자칫 당시 예수가 전달하려 했던 것이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20. 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가로되, "하늘나라가 어떠한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소서."

그가 그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것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같도다.

겨자씨는 모든 씨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로되,

그것이 잘 갈아놓은 땅에 떨어지면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식물을 내니, 하늘의 새들을 위한 보금자리가 되나니라."

 

해석 - 

20절의 비유는 전반적으로 하늘왕국이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믿음과 영적 성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존재의 상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직 영적인 깨달음이 없는 상태인 지금은 비록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영적으로 깨닫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21. 마리아가 예수께 여쭈어 가로되, "당신의 따르는 자들이 어떠 하오니이까?"

예수가 말하기를, "그들은 그들의 것이 아닌 밭에서 사는 아해들과 같도다.

그 밭의 주인들이 올 때에, 그 주인들은 ‘ 우리의 밭을 우리에게 돌려다오 ’라고 말할 것이다.

아해들은 주인들 앞에서 그들의 옷을, 주인들에게 밭을 돌려주기 위하여, 벗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아해들은 그들의 밭을 주인들에게 돌려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내가 이르노니, 한 집의 주인이 한 도적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주인은 그 도적이 도착하기 이전에 방비 태세에 있을 것이요,

그 도적이 그의 소유인 집을 뚫고 들어와 그의 물건을 훔쳐 내가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대하여 방비 태세에 있으라.

너희 자신들을 강건한 힘으로 무장하여, 도둑들이 너희에게 도달하는 길을 발견할 수 없도록 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기대하는 환난이 결국 닥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라.

너희들 가운데 내 말을 이해하는 한 사람이 있기를 바라노라.

곡식이 익었을 때가 되면, 곧 그 사람이 손에 낫을 들고 와서 그것을 추수하였나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

 

해석 -

두 번째 구절 - 제자들이 세상에 있지만 세속적이거나 타락하지는 않았음을 시사한다.

세 번째 구절 - 예수의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세상의 것들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네 번째 구절 - 세상의 물질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세상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도록 자신을 단련해야 함을 시사한다.

다섯 번째 구절 -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오는 위기나 기회를 인식하여 포착하고 최대한 방비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함을 내포하고 있다.

종합 - 비유를 활용하여 전개되고 있는 21절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잘 파악하고, 스스로를 방어하고, 강화하여 스스로를 지키는 주인공으로서 일어서야 하고,

항상 그들에게 친절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세상을 헤쳐나갈 때 세상을 경계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면서도 세상적인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22. 예수께서 몇 아기들이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보시었다. 예수께서 그의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젖을 빨고 있는 아기들이야말로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과 같나니라."

그들이 예수께 가로되, "그리하면 우리는 아기로서만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들이 속을 겉과 같이 만들고, 또 겉을 속과 같이 만들고, 또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 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할 때,

그리고 너희가 눈 있는 자리에 눈을 만들고, 손 있는 자리에 손을 만들고, 발 있는 자리에 발을 만들고, 모습 있는 자리에 모습을 만들 때,

비로소 너희는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

 

해석 -

22절은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이뤄야 할 영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여러 은유를 빌어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예수는 여러 가지의 이원적인 것들에 대한 비유를 통해 이원론적 사고를 배제하고 삶의 영적 측면과 육체적 측면 사이의 균형과 근본적인 영적 깨달음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23절에서 예수는 영적인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섬을 통해 인지하게 되는 초현실적인 영역 즉, 예수가 말하는 왕국을 느끼기 위해서는 관점의 변화, 반대의 통일, 신체적, 성별에 기반한 한계를 뛰어넘는 심오한 영적 변화를 거쳐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23.예수가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택하리라. 천 명 가운데서 하나를, 만 명 가운데서 둘을. 그리고 그들은 하나 된 자로서 서있게 되리라."

 

해석 -

23절은 나머지와 차별화된 소수의 선택된 개인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표현으로 이를 영적 측면에서의 '일당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23절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따를 것이라고 말하는 은유적 표현이 담겨 있는 구절이다.

한 사람으로 설 것이다"라는 말의 마지막 부분은 선택된 사람들이 공통의 목적이나 목표로 연합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24. 그의 따르는 자들이 가로되, "당신이 계신 곳을 우리에게 보여주소서. 우리가 그곳을 찾아야 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하기를, "귀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

광채 나는 사람 속에는 반드시 빛이 있나니, 그 빛은 온 세상을 비추나니라.

그것이 빛나지 아니하면 그것은 곧 어둠이니라."

 

해석 -

24절 역시 도마복음 전체에 흐르고 있는 예수 특유의 은유기법이 활용된 구절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빛'은 내적 성찰과 개인적인 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적 지식, 통찰력 및 이해를 의미한다.

그리고 23절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따를 것이라고 말하는 은유적 표현이 담겨 있는 구절이다.

24절의 예수는 제자들 모두에게 지혜와 지식을 영적인 빛으로 빛나게 할 잠재력이 있지만, 그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빛을 드러내려면 노력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25. 예수가 말하기를, "네 형제를 네 영혼과 같이 사랑하라. 그 사람을 네 눈의 동자처럼 보호하라."

 

해석 -

25절은 제자들 각자가 자신의 동료들을 어떻게 대하고 지켜야 하는지를 전달하는 예수의 메시지가 담긴 구절이다.

25절에서 예수는 말 그대로 자신의 육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그 영혼을 사랑하듯 동료를 사랑하고, 자신의 눈을 자신이 보호하듯 동료를 보호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26. 예수가 말하기를, "너는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는도다. 그러나 너는 네 자신의 눈 속에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도다.

네 자신의 눈으로부터 들보를 빼낼 때에야 비로소 너는 밝히 보리니, 그제야 너의 형제의 눈으로부터 티를 빼줄 수 있으리라."

 

해석 -

26절에서의 예수는 자신의 결점과 한계를 무시하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제자들의 경향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즉, 예수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함으로써 형제들을 도울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를 다르게 풀어보면 형제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잘못을 검토하고,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해결함으로써 형제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대안을 더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27.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가 이 세상으로부터 금식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나라를 발견하지 못하리라.

너희가 안식일을 안식일로서 지키지 않는다면, 너희는 아버지를 볼 수 없으리라."

 

27. [원문 그대로 번역] :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가 옛 세계를 끊지 않는다면, 너희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리라.

너희가 안식일을 안식일로서 지키지 않는다면, 너희는 아버지 나라를 볼 수 없으리라."

 

해석 -

첫 줄 - 영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초연한 사고방식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다.

둘째 줄 - 새로운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깨달음을 위해선 그 깨달음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기꺼이 할애하는 것이 매우 당연하고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27절에 등장하는 왕국과 아버지는 같은 뜻이다.

27절에서 예수가 전달하고 싶었던 '새로운 세계(new world)'라는 것은 지난 수천 년 동안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유사종교 지도자들이 교인들을 세뇌시켜 오고 있는 신앙의 결과물로서 받게 될 것이라는 물리적 공간으로써의 천국과는 전혀 거리가 먼,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는 노력을 통해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접하게 되는 새로운 영적인 세계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28. 예수가 말하기를, "나는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그들 모두가 취해 있으며, 그들 중 누구도 목 말라 하지 않음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마음의 눈이 멀고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없이 태어났다가 영적인 깨달음이 없이 공허하게 세상을 떠날 것을 보니 내 영혼이 매우 고통스럽다.

그러나 포도주 잔을 흔들어 마시고 취해 있는 것은 순간이다.

(그때가 되면)그때 그들은 후회할 것이다."

 

해석 -

28절은 육체를 갖고 태어난 한 인간임을 선언하고 있는 그 예수가 가까이에서 바라본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지에 대한 모습과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예수의 마음이 담긴 구절이다.

술에 취한 상태는 세속적인 쾌락에 도취된 상태를 의미.

목마르지 않았다는 영적 측면에서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갈망하지 않음을 의미.

28절의 예수는 아무것도 없이 태어났다가 영적인 깨달음이 없이 공허하게 세상을 떠나려는 인간들, 그리고 자신의 영적 측면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 없는 인간의 영적 시각장애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예수는 언젠가는 사람들이 영적 시각장애 상태에서 깨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8절에는 "영적인 깨달음 보다 찰나의 시간 속 세속적인 쾌락에 대한 탐닉을 추구하다 정말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이 다시 무의 상태로 돌아가는 인간들의 허무한 삶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는 예수의 인간적 고뇌가 담겨 있다..

 

29. 예수가 말하기를, "육신(행동, 행위)이 영혼으로 인하여 드러났다면, 그것은 기적이로다.

그러나 영혼이 육신(행동, 행위)로 인하여 드러났다면,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로다.

그러나 진실로 나는 어떻게 이토록 위대한 부유함이 이토록 빈곤함 속에 거(居)하게 되었는지 불가사의하게 생각하노라."

 

해석 -

첫 번째 줄, 29절에서 예수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다.

두 번째 줄, 영혼이 육신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으나 반대로 육신이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능성이 불가능에 가깝다

세 번째 줄, '불가사의하다'라는 표현을 이용하여 두 번째 줄의 표현을 한번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29절을 도마복음의 다른 구절들과 연관시켜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48, 50, 61, 81, 83절과 관련되는 구절이다.

29절은 인간이 갖고 있는 영혼의 위대함을 매우 극명하게 설파하는 구절이며, 동시에 예수가 추구하는 천국운동의 핵심사상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구절이다.

 

그리고 29절을 통하여 예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천국운동의 핵심은 세속적이며, 탐욕적인 육신의 욕망을 극복함으로써 영혼의 형상이 육신을 통하여 구체화되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진짜 부자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10절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또한 29절은 자체적인 형상이 없는 영혼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그 영혼이 육신의 모습으로 온전히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면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된다(드러나게 된다)는 것"이 언어로 표현하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을 이루어 낸 인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기적에 가까울 만큼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 부분은 50절의 "빛은 그들의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부분과 관련 있다.

그리고 역시 81절에서의 "자신의 영적인 부분이 육체를 지배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과 그 의미가 연결된다.

또한 83절과도 그 의미가 연결되고 있다.

 

30.예수가 말하기를, 세 명의 신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은 모두 신이다.

두 명이나 한 명이 있는 곳에서 나는 그와 함께 하노라."

 

해석 -

'신'의 의미를 사람들이 인도나 구원을 위해 바라볼 수 있는 힘이나 권위의 근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더 광범위하게 해석한다면,

30절은 사람들이 믿는 믿음의 대상(출처)이 다양하더라도 그 출처는 모두 타당하고 존경받을 가치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두 번째 줄은 예수는 개인적인 영적 경험과 종교적 또는 문화적 배경에 관계없이 개인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진술로 해석할 수 있다.

'신'을 우리 주변의 사람으로 비유하면 세 사람이 있는 곳은 부족함이 없는 상류층을 의미하고, 한 두 사람이 있는 곳은 풍족하지 못한 계층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쉽게 풀어서 보면 당시 역사적 인간예수는 모든 것을 갖춘 상류층 보다는 뭔가 부족하고 배움이 필요한 이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동양사상 공자의 말씀 중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 될 사람이 있으니, 그중 좋은 점은 골라서 따르고, 좋지 않은 것은 거울삼아 고치도록 한다.

 

31.예수가 말하기를, 어떤 선지자도 자기 마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어떤 의사도 자신을 아는 사람들을 고치지 않는다."

해석 -

첫 번째 줄은 선지자와 가깝거나 어렸을 때부터 선지자를 알고 지낸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거나 선지자의 주장을 묵살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암시한다.

두 번째 줄은 의사가 고도로 숙련되고 지식이 풍부하더라도 의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의사의 진단을 신뢰하거나 조언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즉, 그들이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사람들의 의사에 대한 개인적인 편견이 치유 능력을 방해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31절 통해 우리는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의 설교활동이 인정받지 못할 것임을 우려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에 의하여 지난 2천 년 동안 포장된 신이 아니라 만약 당시에 이미 진짜 신이었다면 31절의 우려 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32. 예수가 말하기를, "높은 산 위에 지어진, 요새처럼 강화된 도시는 무너질 수 없고, 또한 숨겨질 수도 없다."

 

해석 -

여기에서 요새화된 도시라는 것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조직 또는 예수가 지속적으로 알리고자 했던 그 어떤 무엇, 이를테면 깨달음의 영역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왕국과 같은 개념을 대입해서 볼 수 있다.

높은 산에 세워져 요새화된 도시가 무너지지도 않지만 숨겨질 수도 없는 것처럼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조직이나 왕국 역시 무너지지도 않고, 또한 세상에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

 

33.예수가 말하기를, 너의 귀로 네가 듣는 것을, 너희 집 지붕 위에서 타인의 귀로 전파하라.

그 어느 누구도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 감추거나,숨겨진 장소에 두거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등경 위에 올려놓나니,이는 집안에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해석 -

 

예수의 가르침 그리고 그로 인한 자신의 영적 깨달음과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

본질적으로 33절에서 예수는 영적인 깨달음을 자신의 삶에 반영하고 그 신념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34. 예수가 말하기를,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면 둘이 다 구멍에 빠지리라."

 

해석 -

34절은 누군가의 지식, 지혜 또는 의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조사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에 대해 경고를 담고 있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누군가를 사리분별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무조건 추종하는 것은 위험하고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35. 예수가 말하기를, "누구든지 강한 자의 집에 쳐들어가 그의 양손을 결박하지 않고서는 그 집을 약탈하지 못하리라; 결박한 후에야 강한 자의 집을 샅샅이 늑탈할 수 있으리라."

 

해석 -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장애물과 도전을 극복해야 할 수도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해석되는 구절이다.

35절의 '강한 사람'이라는 대상을 인간 내면으로 가져오면 모든 인간마다 갖고 있는 '습관' 같은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진정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발견과 같은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목표를 달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습관 같은 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함을 예수는 강조하고 있다.

 

36.예수가 말하기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해석 -

36절은 의복과 같은 물질적 소유 같은 것에 사로잡혀 더 중요한 것을 놓치면 안 됨을 강조하는 뜻이 담긴 구절이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가 더 의미 있는 삶을 누리는데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전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더 나아가서 물질을 통한 당장의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궁극적으로 내적인 발전을 추구할 것을 예수는 강조하고 있다.

물질적인 욕망에 대한 탐닉의 끝에서 얻게 되는 짧은 만족감 뒤에 마주하게 되는 것은 깊은 허망함이다.

그 허무함을 쫓기보다는 내적영역의 탐구에 대한 투자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풍족하게 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만족감이 더 크고 오래가며, 더 의미가 있음을 전달하고자 했던  당시의 역사적 인간 예수는 종교나 신 그 어떤 것과도 관련이 없고 대다수가 보지 못하는 뭔가를 깨달은 자신이 사람들을 향해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뭔가를 전달하고자 하고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37.그를 따르는 자들이 여쭈어 가로되, "당신이 깨달은 것은 언제 우리에게 드러나게 되오리이까, 그리고 당신이 깨달은 것을 언제 우리가 알게 되오리이까?"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가 부끄럼 없이 발가벗을 때, 그리고 너희가 어린 아이처럼 너희 옷을 발아래 두고 짓밟을 때,

비로소 너희는 살아있는 (내면의) 존재를 마지못해서가 아닌 진심으로 깨닫게 되리라."

 

해석 -

37절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도마복음 37절의 영문 번역본을 직역이 아닌 의역을 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한 당시 제자들이 어떤 자들이었는지, 그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제자들이 예수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등에 대하여 다각적인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는 제자들이 유대교라는 당대 절대종교하에서 지금껏 익숙해져 있던 모든 세속적인 고정관념과 자존심 그리고 물질에 대한 욕구를 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상태가 될 때에 비로소 살아 있는 내면의 존재를 마지못해서가 아닌 진심으로 깨닫게 됨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어린아이' 혹은 이와 유사한 표현은 도마복음 여러 곳에서 예수가 인용했던 표현이다.

 

38.예수가 말하기를, "다른 사람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나의 설교를 듣기를 너희는 수 차례 희망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는 때가 올 것이다."

 

해석 -

38절의 예수는 살아 있는 자신의 입을 통한 설교가 무엇보다 의미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38절의 살아있던 당시 예수는 왜 "자신을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말을 남겼을까라는 질문을 당연히 해야 하고 그 질문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어쩌면 다음과 같은 불변의 진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으며, 죽게 되면 더 이상 누구에게도 드러날 수 없게 되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불변의 진리 말이다.

또한 만약 당시 역사적 인간 예수가 현재의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이 가능한, 죽지 않는 영생의 신적인 존재였다면 당시에 예수는 38절에서와 같이 다시 볼 수 없는 날이 있을 것임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 가능하지 않음은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속칭 요한복음 7장 33절 ~ 34절에 분명히 적시되어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2천 년 동안 그리고 지금도 예수를 팔고 있는 수많은 종교들은 여전히 예수가 마치 다시 현실에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예수가 재림할 것이라며 수많은 교인들을 현혹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십, 수백 차례에 걸쳐 수정이란 이름으로 조작되어 왔던 성경, 언젠가 그 조작의 과정에서 요한복음의 7장에서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부분들이 깡그리 삭제되는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예견해 본다.

기독교는 물론 예수를 팔아먹고 있는 모든 종교들 입장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그 어떤 것도 성경에 남아 있지 않길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39. 예수가 말하기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영적) 지식의 열쇠들을 움켜쥐고 그것들을 숨겨버렸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영적 지식의 세계에) 입문하지도 않았고 또 입문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해석 -

39절은 예수가 살던 시대에 유대교의 전승을 주도했던 바리새인, 서기관들 특히, 중요한 영적 지식을 사람들에게 숨긴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구절이다.

예수는 이와 관련하여 영적 지식에 대한 이해를 위해 종교 지도자나 기관에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지식과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함을 제자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또한 스스로 영적 지식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되 그 진리를 찾는 데 있어서 슬기로움과 분별력을 가질 것을 제자들에게 주문하고 있다.

 

40. 예수가 말하기를,

"건강하게 자라지 못할정도로 빛이 없는 곳에 심어진 포도나무는 뿌리채 뽑혀서 사라질 것이다."

 

해석 -

50절에 "아버지"를 살아 있는 빛"으로 표현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를 인용하여 "아버지"를 살아 있는 빛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역사적 인간 예수가 제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들의 맥락에서 볼 때에 40절의 '포도나무'는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거짓 가르침이나 신뢰에 대한 경고에 대한 비유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풀어서 보면,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짓 가르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깊이와 내용의 부족이 드러나게 된다.

즉, 40절의 예수는 건강한 토양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포도나무가 결국 시들어 죽는 것처럼, 진리에 근거하지 않은 거짓 가르침 역시 결국 거짓임이 폭로되면서 사라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41.예수가 말하기를,

"손에 무엇이라도 가진 자는 더욱 받게 될 것이요,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가 조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다. "

 

해석 -

부를 향한 인간의 보편적이며 끊임없는 욕망의 추구형태를 영적 깨달음을 설명하는데 활용하고 있는 구절이다.

대다수의 인간은 자신이 소유한 물질적 가치나 재화의 크기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 크기를 늘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물질적 욕망과 부의 추구에 한계가 없는 것이 불변의 진리나 다름없음을 보여 준다.

반면에 부에 대한 욕심이 없으면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영적 깨달음의 영역에서 보면, 인간이 영적영역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되면 이를 계기로 더 많은 깨달음을 추구하게 되고 이는 더 큰 영적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됨을 의미한다.

반면에 통찰력에 대해 닫혀 있거나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잃게 됨을 예수는 설명하고 있다.

 

42.예수가 말하기를, " 방랑하는 자들이 되어라.

 

해석 -

42절은 인간존재의 유한함과 물질적 욕망의 허무함에 대하여 축약되어 있으면서도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42절에서 예수는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없듯이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물질들 역시 죽음과 동시에 그 사람에게서 사라진다는 부정할 수 없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영문 도마복음 42절의 'passers-by'는 단순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물질적인 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즉, 42절은 자신의 죽음과 동시에 자신의 소유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는 물질들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 것을 강조한 구절이다.

더 나아가 살아있는 동안 소유하게 되는 물질들은 잠깐 스쳐가는 것들에 불과하므로 도마복음 전체에 흐르고 있는 정신수양, 영적인 깨달음에 주력할 것을 역사적인간 예수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43절 본문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43절은 영문을 잘못 번역하면 얼마나 괴상한 형태가 되는지를 매우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시중에 변역되어 돌아다니는 도마복음 43절 중에 매우 이상하게 번역된 경우를 왕왕 보게 된다. 43절을 번역함에 있어 "NOT A BUT B" 구문의 해석방식을 이용해야 제대로 된 번역이 된다.

43.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말해야만 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는 내가 말하는 것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를 좋아하면서 그 열매를 싫어하거나 혹은 열매를 좋아하면서 그 나무를 싫어하는 유대인들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해석 -

43절에 나타나 있는 역사적 인간 예수는 유대인이라는 비유를 통해 유대인들처럼 제자들이 피상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예수가 진정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더 깊은 의미를 놓치면 안 됨을 제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즉, 43절의 예수는 표면 너머를 바라보고 더 깊은 이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44.예수가 말하기를, "아버지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누구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리고 아들에 대해 모독하는 자도 누구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거룩한 정신(영혼, 성령)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이 땅에서도 저 하늘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다.

 

해석 -

44절은 도마복음 영문을 참고하여 약간 상세하게 해석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시중에 나와 있는 도마복음 한글 해석본 전체를 통틀어 이 구절에서 유일하게 44절에 등장하는 "성령"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것이다.

때문에 44절을 해석하기 위하여는 최소한 콥트어를 영어로 번역한 문구를 반드시 참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도마복음 44절 마지막 줄에 등장하는 "누구든지 성령에 대해 모독하는 자"라는 부분은 영어로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http://gnosis.org/naghamm/gthlamb.html)

위 영문을 있는 구글 번역기에서 돌리면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라 번역이 되며 또한 구글 번역 역시 문장 전체의 번역에 있어 "holy spirit"가 성령이란 문구로 번역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holy spirit" 만을 떼어서 두 개의 단어를 각각 별도로 번역을 하면 매우 다른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정신(정기, 기상)"이다.

여기에서 더 들어가서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 "성령"이라는 단어가 '성스러운 영혼'의 줄임말이며, 여기에서 "영혼"은 곧 정신과 같은 의미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약 영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죽은 시체와 다름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은 종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이미 그 자체로 인간의 생명 그 자체이며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라는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거룩한 정신"(성스러운 영혼, 내면의 빛)은 인간의 생명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와 목사들이 흔히 말하는 '성령의 감동' '성령의 은혜'라는 것이 실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껏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던 영혼의 내적 교감 혹은 내면의 감동이라 표현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목사들이 "영혼의 내적 교감"을 "성령의 감동"이라 말하고, 마치 예수나 하나님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것 마냥 포장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교인들의 교회 충성을 유도하고, 재물을 바치도록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다시 "holy spirit"로 돌아와 다시 보면 holy에는 "거룩한"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spirit에는 정신이라는 의미가 있음을 이해할 때 우리는"holy spirit"를 해석함에 있어 "성령"이라 해석하기보다는 "거룩한 정신" 또는 "거룩한 정기(기상)"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 상 어울림을 깨닫게 된다.

"왜 이렇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도올선생의 강의 한토막 내용을 인용하여 답변하고 싶다.

현재는 유료구독자에게만 보여지면서 사실상 비공개 상태가 되었지만 도올 선생은 도마복음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석가모니나 예수는 당시 포교활동을 하거나, 도반이나 대중을 상대로 예수운동을 하는 등의 말씀을 전할 때에 두 분 다 공통적으로 종교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인간 예수가 천국운동을 하던 당시, 종교라는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 두지 않았던 예수가 성령이라는 의미를 입에 올렸을 리가 없거니와, 표현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예수의 천국운동은 유대인들의 율법(현재의 구약성경)에 저항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예수가 유대인들의 유대교 경전(현재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성령을 추종하거나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다.

또한 예수는 도반들에게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지속적인 탐구와 노력을 통하여 정신적인 수양을 통한 해탈과 같은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44절의 "holy spirit"을 성령이 아닌 "거룩한 정신"으로 해석하게 된 이유다.

 

최종적으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44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볼 수 있다.

44절의 아버지나 아들은 말 그대로 가족의 개념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이다.

(도마복음은 살아 있는 예수가 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령. 아버지, 아들이란 단어가 등장한다고 하여 성경의 아버지, 아들, 성령과 연결시키려 드는 순간 그 해석은 안드로메다로 가 버릴 우려가 발생하게 된다.)

가족 간에 잘못을 한 것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혹은 자신의 거룩한 정신을 부정하거나, 더럽혀 욕되게 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임을 예수가 도반들에게 강조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추가적으로, 비유를 하자면 만일 예수의 말씀을 들은 도반들이 43절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면

예수로서는 자신의 거룩한 정신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바로 44절이라 할 수 있겠다.

 

45. 예수가 말하기를,

"가시나무와 엉퀴는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수확할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모을 수도 없다.

선한 사람은 곶간으로부터 선한 말과 행동이 나오고,

악한 사람은 나쁜 곶간으로부터 나쁜 행동이 나오고 악한 것들을 말한다.<

악한 것들로 마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45절 역시 도마복음 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 특유의 '은유'기법이 나타나 있는 구절이다.

예를 들면 "포도"와 "무화과"는 긍정적이고 선한 행동을 나타내고 "가시"와 "엉겅퀴"는 부정적이고 악한 행동을 상징한다.

45절은 "말은 마음의 거울"이라는 명언과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45절에서의 '창고(곳간)'는 사람의 생각, 감정, 의도와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내면의 영역을 의미한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생각의 저수지' 혹은 '감정의 저수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마음 전체일 수도 있고, 마음 일부일 수도 있다.

45절에서의 예수는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이 선이든 악이든 필연적으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므로 선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기르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46. 예수가 말하기를, "아담으로부터 세례 요한까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아니할 만큼 세례 요한보다 뛰어난 자가 없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어린아이가 되면 나라를 알게 되고 요한보다 뛰어난 사람이 될 것이다."

 

해석 -

46절은 당대 예수가 강조했던 왕국운동의 핵심을 잘 드러나 있는 대표적인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당대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던 요한을 칭송하며 어떻게 해야 요한보다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매우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라 함은 어린아이들이 갖고 있는 순수함과 겸손함을 갖춘 상태를 말한다. 예수는 이러한 어린이이의 시각으로 영적인 세계(나라, 왕국)를 바라볼 것을 계속 도마복음 내내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인 깨달음(통찰)은 아무나 쉽게 이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닐 것이다. 쉽게 얻어지는 것이었다면 예수가 굳이 요한을 거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세계 4대 성인이라는 성인 숫자는 수천, 수만 명에 이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46절은 다른 도마복음 한글번역과 비교할 때에 약간 수정되어 있다. 매끄럽게 하기 위해서 혹은 너무 종교적이거나 기독교 적인 관점에서의 번역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다른 구절에서도 이런 부분들을 목격하게 될 수 있다.

재차 반복하지만 당시 역사적 인간 예수의 뇌리에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의 기독교를 비롯하여 예수와 관련된 많은 기타 종교나 성경의 관점을 배제할 때에 도마복음 해석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

이는 도마복음을 해석함에 있어 종교적 접근을 배제한 보편적이고 원론적 시각에서의 접근과 해석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47. 예수가 말하기를, " 한 사람이 동시에 두 말 위에 올라탈 수 없고, 한 사람이 동시에 두 활을 당길 수 없다.

그리고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그 종은 한 주인은 영예롭게 할 것이나 또 한 주인은 거스르게 되리라.

그 어느 누구도 오래 묵은 (양질의)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금방 새 포도주를 마시기를 원치 아니한다.

그리고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부대에 부어 넣지 않는다. 낡은 가죽부대가 터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 묵은(양질의)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쏟아붓지도 않는다.

그(양질의 포도주의) 맛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낡은 천조각을 새 옷에다가 기워 붙이지 않는다. 그것은 새 천에 안 맞아 다시 터질 것이기 때문이니라.

 

해석 -

47절도 다른 여타 구절들처럼 비유가 활용되고 있는 구절이지만 그중에서도 독특하게 비현실적이고 상충되는 여러 가지 예들이 동원된 구절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인간 예수는 47절에서 여러 가지 상충되는 예들을 들어가면서 무엇을 제자들에게 말하고자 한 것인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답은 마가복음 2장 21절~22절에 잘 드러나 있다. 간략하게 표현하면 우리가 잘 아는 격언인 "새 술은 새 부대에"라고 할 수 있다.

47절을 통해 역사적 인간 예수는 당시 모든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에 있던 유대사상으로부터의 독립과 사회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새롭고 다양한 접근방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예수가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을 비판하고 있었던 점에서 47절은 제자들이 자신의 설교를 유대인의 율법에 맞추려 하거나, 율법의 기준에서 해석하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구절이라고 볼 수 있다.

 

48. 예수가 말하기를, "한 집안 속에서 둘이 서로 평화를 이룩할 수 있으면, 그들이 산을 보고 ' 여기서 움직여라!'라고 말하면, 산이 움직이리라.

 

해석 - 48절의 "집안"은 눈에 보이는 형태의 구조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정신적 영역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집안 속에서 둘이 서로 평화를 이룩할 수 있으면"이 의미하는 것은 29절에 등장하는 세속적인 탐욕에 대한 욕망을 극복함으로써 영혼이 육신의 모습으로 존재케 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과 유사한 표현을 61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48절의 "평화"라는 단어는 61절의 "분열되지 않는 전체"와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다.

48절의 후미 부분은 실제로 산이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게 됨으로써 그 정도로 어려운 목표를 완수하거나 놀라운 경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의미다.

 

49. 예수가 말하기를,

"나라를 발견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왔고, 또 다시 나라로 돌아가기 위하여

고독하고 선택받은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다."

 

해석 -

시중에 나와 있는 도마복음 한글 해석본들을 보면 여러 구절에서 기계적으로 구글번역기를 돌린 것을 그대로 베껴 퍼트림으로써 앞뒤가 맞지 않는 한글 번역본들이 마치 정통 도마복음 한글번역본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새롭게 번역을 하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현실이다.

앞에도 몇 군데 재번역한 구절들이 있었듯이 49절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문장해석을 다시 하였다.

시중에 나와 있는 도마복음 49절 한글해석과 비교해서 봐주시길 바란다.

49절의 '고독한 자'라는 의미는 영적인 성찰의 길을 선택 후 깨달음의 영역에 이르는 과정이란 것이 다른 사람과 대화 같은 것으로는 이룰 수 없고 혼자서 해내야 하는 길고 긴 외로움과의 싸움이고 홀로 견뎌야 하는 고독한 여정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도마복음이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형태로 각 구절들이 구성되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49절의 '선택받은 자'라는 의미는 예수에게 제자로 선택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한 '나라'(왕국)는 4절, 37절, 46절에 등장하는 세속의 때가 묻은 어른이 아닌 순수한 '아이' 눈으로 볼 때에 보일 수 있는 그 영역과 동일한 영적인 영역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여러구절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아이' 관련 비유들을 통해 당시 역사적 인간 예수가 추구했던 나라운동, 왕국운동의 본질이 결국 생을 마감하고 영원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 육체를 지닌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내면의 깊은 영적이해의 추구와 영적본성의 발견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49절의 예수는 나이가 들면서 아이의 정신세계를 벗어나 어른의 정신세계로 온 제자들이 다시 아이의 정신세계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도마복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이렇듯 49절을 통해서도 역사적 인간 예수는 제자들이 영적추구의 길을 선택하고 고독한 고행을 통해 아이 시절의 순수한 영혼의 눈으로 자신들의 영적인 영역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끊임없이 희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0. 예수가 말하기를, 만약 그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너희는 어디서 왔느뇨?' 하면

그들에게 말하라: '우리는 빛에서 비롯되었다. 그곳은 스스로 생성되어 자리를 잡고 이미지를 통해 분명해지는 영역이다.'

만약 그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그 빛이 당신들인가?' 하면,

그들에게 말하라,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아버지의 선택된 자이다.'

만약 그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너의 속에 있는 아버지(빛)의 징표는 무엇인가?'라고 하면

그들에게 말하라, '그것은 (살아서)움직이는 것과 휴식(안식)이다.'"

 

해석 -

50절은 상세하게 설명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어 불가피하게 내용이 많아졌다.

50절의 핵심은 '생명'과 '아버지' 그리고 '움직임과 휴식'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 부분들은 아래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50절도 직역이 아닌 의역을 하였기 때문에 학자들의 구글번역기식 직역에 비하여 약간 다른 부분들이 있다.

윗부분의 '빛에서 왔다'는 의미가 우리가 매일 보는 태양빛과 같은 진짜 빛에서 왔다거나 혹은 외계인이 무슨 우주선 타고 왔다는 것처럼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빛이 있기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혹은 '빛에서 시작되었다, 비롯되었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앞뒤 문맥이 맞게 된다.

이는 아래 부분들을 읽어보면 더욱 선명하게 이해가 될 것이다.

29구절에서 예수는 육신이 영혼으로 인하여 드러남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구체적으로 깊은 깨달음을 통해 내면에 있는 것이 육체를 통해 드러나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50절의 첫 줄, 두 번째 줄과 관련 있다.

50절의 예수는 생명이 있는 무엇이든 무엇인가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을 주관하는 것이 지난 2천년 동안 역사적 인간 예수를 신격화한 수많은 종교들이 말하는 그 예수가 아님은 분명하다. 

이러한 점은 도마복음 영문번역본 50절에서 사용된 영문구절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영문을 보면 예수가 자신 이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You'가 아닌 자신을 포함하는 'we'라픈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만약 예수가 그러한 위치에 있었다면 50절 본문 중 "We are its children, we are the elect of the living father"이 "We are his children, we are his elect "로 바꿔 표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마지막 부분인 "It is movement and repose"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50절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가 제자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빛의 상태를 '움직임과 휴식'이란 두 축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육체적 인간 예수가 빛과 동일하지 않음을 삼척동자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50절을 통해 우리는 도마복음에서 예수가 언급하는 '빛'이라는 것이 육체가 아닌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육체와 불가분의 관계로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라는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이를 단순하게 풀어보면,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그 무엇인가를 kingdom, father, light라는 용어를 사용해 여러 구절에서 표현하고 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겠으나 이를 우리 상식에 맞게 풀어보면 영적인 영역, 즉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항상 함께 하는 존재(내면에 존재하는 생명의 빛)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죽음으로써 인간의 몸에서 영혼이 분리되면 인간의 몸은 단지 죽은 육체에 불과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상식적인 부분을 통해 우리는 50절에서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을 영혼이 육체와 함께 하고 있는 상태 즉, 어쩌면 육체가 영혼의 선택을 받은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영혼이 육체에 생명을 준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살아있는 영혼(내면에 존재하는 생명의 빛)의 '자녀'와 '아버지(내면의 빛, 영혼)의 선택된 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50절 마지막 줄의 '움직임과 휴식'에 관하여 '삶과 죽음'이란 예를 주제로 놓고 살펴보면,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이라면 누구나 늘 생각을 하는 행위가  끊임없이 반복되게 되는데 예수는 이를 (내면의) 움직임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육체가 살아 움직이는 동안 영혼(빛)이 함께 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예수는 이를 'movement'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영혼(빛)과 관련한 움직임의 예를 매우 다양하게 볼 필요가 있다,

이와 반대로 육체가 죽는 순간 생각이란 것을 더 이상 못하게 되고 내면의 활동(움직임)이 없는 상태 즉, 영혼(빛)은 영원한 휴식에 들어가게 된다. 예수는 이를 'repose'로 표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도마복음에서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light(kingdom, father)가 육체를 살아 있는 상태로 있게 해주는 진짜 생명(영혼)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접근하게 된다.

 

또는'움직임과 휴식'은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살아있는 동안에 겪게 되는 여러사건들과 관련하여 '번민과 평안'이라는 주제로 설명될 수도 있다.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접하게 되는 목표, 물적욕망, 승진, 결혼 등 매우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고뇌와 번민으로 표현할 수 있 내면의 움직임 그리고 영적인 깨달음을 통해 이러한 고뇌와 번민으로부터 벗어나 평안을 찾는 안식(휴식).

 

51.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다, "언제 죽은 자의 안식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언제 새 세상이 오겠습니까?"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기다리는 것은 이미 와 있노라. 단지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니라."

 

해석 -

51절을 보면 제자들의 두 가지 질문 중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는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38절과 59절에 나타나 있는 역사적 인간의 육체적 삶이 끝나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예수의 확고한 신념을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당시 역사적 인간 예수에게 '안식'이란 살아있는 상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내면적 영역의 깨달음과 관련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51절 두 번째 줄에서 나타난 예수의 답변을 보면 제자들이 기대하는 것과 예수가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름이 드러나 있다.

본질적으로 51절의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추구하는 왕국(새로운 세상, 나라, 아버지, 안식)은 단순히 미래의 사건이나 먼 곳 즉, 모습을 갖춘 공간이 아니라 영적 통찰력과 인식을 통해 내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상태로 현재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역사적 인간 예수를 신의 아들로 둔갑시켜 2천 년 동안 인류의 고혈을 빨며 권세를 누려온 기독교로 대표되는 모든 종교집단들은 지금도 천국이 마치 새로운 공간이나 새로운 세상인 것처럼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독교를 비롯하여 예수를 팔아 2천 년간 권세를 누려온 종교들의 허구는 요한복음 7장 33~34절과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도 잘 드러나 있다.

 

52. 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스물넷 예언자들이 히브리인들에게 말씀하였나이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말씀하였나이다."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면전에 있는 살아있는 자를 보지 아니하고, 죽은 자들만을 이야기하는구나!"

 

해석 -

52절 역시 인터넷에 많이 나와 있는 구글번역기(번역에 종교 특히 기독교적인 색채가 깔려 있다) 힘을 빌린듯한 직역이 아닌 의역을 통해 새롭게 번역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기독교를 포함한 많은 종교 전통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폭로나 통찰의 가능성과 현재를 간과할 정도로 확립된 전통과 과거를 경외하는 경향이다.

 

52절 첫 줄에 관하여 서술하면

당시 예언자(선지자)로 불렸던 자들은 히브리인들을 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52절의 제자들은 "24명의 예언자가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듯이 같은 히브리인 예수 당신에게도 전달했다"라고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이 예수에게 말하기를 당신도 예언자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신들과 같은 입장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장면이다.

 

52절의 제자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예언자들에게서 들었던 이전의 예언적 전통은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예수가 말하는 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제자들이 행한 결정적인 실수를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제자들이 과거 선지자들의 말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현재 살아있는 자신이 말하는 영적 깨달음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놓치고 있는 것과 관련 있다.

 

53. 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할례가 유용합니까, 유용하지 않습니까?"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약 할례가 유용하다면, 그 아기들의 아버지가 그 아기들을 그들 엄마의 태 속에서부터 이미 할례 된 채로 낳게 하였으리라. 차라리 영 속에서의 진정한 할례야말로 완전 유용하다."

 

해석 -

53절의 예수는 육체적 할례 전통에 대한 이해를 거부하고 있다.

53절을 통해 우리는 예수에게 할례는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마음과 영의 내적 변화였음을 알 수 있다.

53절은 육체적인 할례가 마음과 영의 내적 변화나 정화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전달하고자 한 예수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54. 예수가 말하기를, "하늘의 왕국이 너희의 것이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해석 -

54절 역시 재해석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문맥 상 "제자들을 심령이 가난한 자로 보고 있다"는 전제하에 해석해야 앞뒤 문맥이 조화롭게 이해가 된다.

또한 54절은 110절과 연결 지어 볼 때에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본문의 "하늘의 왕국"은 물질적 탐욕으로부터의 초연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적 깨달음의 상태를 말한다.

본문의 "하늘나라가 너희의 것"이라는 것은 무슨 공간적 개념의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직설적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 느끼는 것들의 소중한 가치를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하다.

54절에는 부와 권력을 하나님의 은총이나 축복의 표시 혹은 지표로 포장했던 많은 문화권들의 지배적인 관습에 대해 반발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이 나타나 있다.

54절은 부와 권력 중심의 지배적인 관습으로부터의 독립을 통해 다른 가치관을 확립함으로써 진정한 왕국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 예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54절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한데,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평생을 걸쳐 끝없이 추구하는 물질적 탐욕이 아니라 자신의 건강한 눈으로 새를 보고, 소리를 듣고, 그 새가 날아다니는 하늘을 보고, 그 하늘에 존재하는 바람을 느끼는 행복 같은 것들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그것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을 느낄 수 있는 바로 여기가 천국인지를 죽음에 임박해서야 그 가치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55. 예수가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의 아버지와 그의 엄마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의 형제와 그의 자매를 미워하지 아니하고, 또 나의 앞에서 그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아니하는 자는 나와 함께하기에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해석 -

AD 1세기 전 팔레스타인 시대는 대가족 중심의 족장문화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가족에 대한 충성심이 절대적인 시대였다.

심지어 결혼조자초 같은 가족 내에서의 동족결혼을 이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시대였다.

55절은 위와 같이 대가족 중심의 족장문화와 가족에 대한 충성심이 절대적이었던 당시 시대상을 비추어 볼 때에 유대교 중심의 문화를 배척하는 예수를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예수가 가장 먼저 무엇을 요구했을지에 대하여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다.

가족을 위해 노동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가족에 대한 그 직분을 다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이는 가족과의 갈등을 불러왔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55절 본문의 '미워함'은 누군가를 감정적으로 미워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를 따름으로 인한 가족 구성원과의 의견충돌과 같은 갈등과 더 나아가 가족과의 단절 등을 의미하며, '십자가'는 예수를 따름으로 인하여 감당해야 하는 몫을 의미하고 있다.

55절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따를 자격을 갖기 위해서 제자들이 무엇을 감수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당시 예수는 매우 구체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6. 예수가 말하기를, "세상이 물질만능주의로 가득한 것을 이해하게 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세계에서 단지 시체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시체를 발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세계의 으뜸이다."

 

해석 - 56절의 '세상'은 물질만능주의로 가득한 세상을 의미하며, '시체를 발견한다'는 것은 깊은 통찰력으로 물질만능주의 추구와 일시적인 쾌락과 인생무상으로 세상이 가득한 것을 느끼게 될 때 마치 영적인 생명이 없는 껍데기 몸을 보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56절 역시 예수 특유의 비유가 들어가 있는 구절이다.

56절은 당시 역사적 인간 예수가 물질주의적 욕망에 깊이 얽혀 있는 사람과 세속적인 추구의 공허함에 대해 이러한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을 매우 다른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는 구절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역사적 인간 예수는 물질보다 영적인 것을 우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7. 예수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나라는 좋은 씨앗을 가진 사람(주인)과 같다."

그 주인의 원수가 밤에 와서 좋은 씨앗 사이에 잡초를 뿌렸다.

그 주인은 하인들이 잡초를 뽑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주인이 말하기를, "너희가 가서 잡초를 뽑으려 하다가, 잡초와 더불어 밀까지 뽑을까 염려가 된다.

왜냐하면 추수의 날에는 잡초는 현저히 드러나게 마련이므로 뽑히어 불사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해석 - 9절을 보면 예수는 말씀을 "씨"로 비유하고 있다.

본문의 "좋은 씨를 가진 자"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하며, 예수는 이것을 57절에서 '아버지의 왕국'이라 표현하고 있다.

57절 역시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흐르고 있는 예수 특유의 비유법이 활용된 구절이다.

구체적으로...

57절 본문의 '잡초'는 증오, 탐욕, 질투, 속임수와 같은 부정적이고 해로운 측면을 나타내며, '좋은 씨앗'은 자질을 상징하는 인간 본성의 긍정적이고 고결한 측면을 나타낸다.

잡초가 좋은 씨앗과 잡초가 함께 성장하도록 둔 주인의 결정은 세상과 개인 안에 선과 악이 모두 존재한다는 인식을 보여주며,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악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강조하고 있는 장면이다.

57절의 핵심은 '추수의 날에 잡초가 드러남'에 있다.

이는 현실에서의 자아성취의 순간 혹은 세상에서 주어진 시간이 끝나는 순간에 자신이 온갖 욕망에 취해 시간들을 허비한 사람과 영혼의 깨달음을 얻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사람이 구별될 것임을 의미한다.

 

58. 예수가 말하기를, "고통을 겪고 생명을 얻은 이는 복이 있다."

 

해석 -

58절의 핵심은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라는 격언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과정의 고통을 이겨낸 뒤에 얻게 되는 깨달음과 같은 귀중한 보상을 강조한 구절이다.

55절이 예수 자신을 따르는 도반들이 응당 감수해야 할 십자가(몫)에 대한 구절이라면,

58절은 55절의 고통을 감내한 도반들이 50절에 언급된 왕국(영혼, 빛)을 발견하게 되는 보상을 표현한 구절이다.

구체적으로...

'고통을 겪고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은 고난을 극복한 사람들이 내면의 영적 영역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됨을 의미한다.

58절의 '고통'은 55절의 십자가를 지는 행위, 부모형제와의 갈등,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겪는 내적갈등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생명을 얻다'는 영적으로 거듭나다. 영적으로 깨닫다. 내면의 변화나 쇄신을 경험하다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59.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가 살아있는 동안에 살아있는 빛을 마음에 새기고 중요시 하라, 너희가 죽어서는 아무리 살아있는 빛을 찾으려고 하여도 찾을 수 없을 터이니."

 

해석 -

구글번역을 그대로 갖다 베낀 듯 보이는 여러 인터넷 사이트의 도마복음 해석과는 다르게 직역을 통해 59절 해석을 시도하였다.

59절을 영문으로 보면 the living 'one'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에 관하여 부연설명 하면,

'the'는 이미 언급되었거나 쉽게 알 수 있는 사람·사물 앞에 붙이는 정관사다.

'one'은 앞에 이미 언급했거나 상대방이 알고 있는 사람·사물을 가리킬 때 명사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 쓰는 대명사다.

즉, 앞에 언급된 적이 있음을 의미하는 부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the living one' 부분이 도마복음에서 예수가 이미 언급했던 3절과 27절의 '나라', 50절의 '빛', 27절과 50절의 '아버지'와 같은 단어를 가리키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본문의 [죽어서는 아무리 살아있는 빛을 찾으려고 하여도 찾을 수 없을 터이니]라는 부분은 죽음 이후에는 살아 있는 동안에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다시는 할 수 없게 됨(영혼소멸)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는 역사적 인간 예수가 죽은 후 그를 따르던 일부 추종자들의 추종자들이 종교를 만들어 그의 가르침을 복음화하고 그를 신의 아들로 만들고, 그 추종자들의 추종자들이 부활론을 창조하여 지난 2천 년 동안 수많은 인간들의 삶과 시간과 온갖 재물을 빼앗는 핵심재료로 써먹고 있는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부분이다.

 

모든 도마복음에 제자들을 향한 당시 역사적 인간 예수의 진심 어린 가르침과 충고가 담겨 있지만 특히 59절을 통해 예수는 제자들에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59절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3절의 일부 문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즉, 모든 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 의미가 있고, 천국은 깨우칠 수 있는 영혼이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있으니 지금 이 순간 매진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살아있는 동안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는 것임을 예수는 제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60. 예수와 제자들은 유다지방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 사람이 어린 양을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그 사람은 양을 몰고 있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말하기를, "그가 양을 죽여서 먹으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양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먹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가 양을 죽여서 시체가 되었을 때에 먹을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말하기를, "그것 외에는 달리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도 시체가 되어 잡아먹히지 않도록 너희의 안식처를 찾아라."

 

해석 -

60절 역시 다른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앞뒤 문맥이 부드럽게 의역을 하였다.

유대로 가는 길에 어린양을 끌고 가는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상징적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주류 유대인 공동체와 다른 사람으로 여겨졌던 사마리아인이 영적 여정에 있는 개인을 상징하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어린양은 흔히 종교적 맥락에서 무죄와 희생을 상징한다.

60절의 '어린양'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자아의 정제되지 않은 측면을 상징한다.

 

사마리아인이 유대에 도착하면 어린양을 잡아먹을 것이고,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제자들의 추측과 주장은 선입견 혹은 상상력 부족,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행동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인간들의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즉, 다른 사람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인간의 경향에 대한 비평이라 할 수 있다.

 

'시체가 되어 잡아먹히지 않도록 안식처를 찾으라'는 마지막 구절은

한마디로 내면의 평화와 영적 성장을 추구하라는 예수의 외침이다.

내적 안식이 없으면 영적으로 생명을 잃거나 부정적인 영향력에 취약해질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즉, 세상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영적으로 깨닫고 새롭게 태어나 더 이상 시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함을 의미한다.

 

61. 예수가 말하기를, "둘이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 한명은 죽을 것이고, 다른 한명은 살게 될 것이다."

살로메가 말하기를, "나의 쇼파에 앉고, 나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나는 분열되지 않고 완전한 존재다. 나는 아버지(내면의 빛)으로부터 생명(깨달음)을 받았다."

...

살로메가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제자입니다."

...

"예수가 말하기를, " 그러므로 단언컨데 사람이 완전체라면 사람의 몸은 빛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분열되면 사람은 어둠으로 가득하거나 파괴될 것입니다."

 

해석 -

61절도 다른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영문번역본 의역을 통해 재해석한 구절이다.

61절은 50절의 'light' 그리고 56절의 'corpse'를 같이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첫 줄 : 침대의 두 명은 영적으로 깨달은 존재와 원초적 본능이 지배하는 존재가 공존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첫 줄과 마지막 줄은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같다. 첫 줄의 die는 darkness, live는 light와 의미가 연결된다.

 

마지막 줄에서 '완전체'와 '분열'에 대하여,

영적인 깨달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면서 삶과 죽음과 관련된 원초적 본능(섹스, 자살, 물적욕망 등)으로써의 성향이 극복되는 상황을 '완전체'라는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초자아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물적, 성적 등의 욕구를 탐하려는 성향과 그것을 억누르려는 두 성향이 서로 공존, 대립하는 상황을 '분열'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원초아와 자아의 공존상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예수가 도마복음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함으로써 영적인 깨달음을 통해 물적, 성적탐닉 등 욕망추구의 원초적 본능을 극복하여 자신을 내면의 빛이 살아 있는 상태로 있도록 함으로써 시체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62. 예수가 말하기를, "나의 비밀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에게 나의 비밀을 말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게 하지 말라."

 

해석 - 55절의 "합당하다"라는 표현이 62절에 다시 등장하하고 있다.

62절 첫 문장은 내면적인 진리에 대한 추구나 지식을 받아들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신비한 이야기들을 들을 자격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영적으로 더 높은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둘째 문장은 자신의 선행을 겉으로 드러내 인정을 받으려 하거나 좋은 평판을 얻으려 하지 말라는 의미다.

 

62절을 통하여 나는 다음의 두 가지를 떠올리게 된다. 우선 62절의 첫 번째 구절은 마태복음 18장 12~14절과는 다소 반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리고 62절의 두 번째 구절은 현대 교회에서 사실상의 교세 확장의 수단으로 전락한 전도를 당시 인간 예수가 보았다면 바람직하지 않게 여겼을 수 있다는 점이다.

 

63. 예수가 말하기를, "돈이 많은 부자가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내 돈을 써서 씨를 뿌리고, 거두고, 심고, 내 창고에 추수한 곡식을 채울 것이고, 그리하여 나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계획하는 것까지만이었다, 그날 밤 그는 죽었다.

귀 있는 자는 나의 말을 들어라."

 

해석 - 63절 역시 문맥들이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약간 수정이 되었다.

63절은 유한하고, 예측 불가능한 삶 속에서의 물질적 부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물질적 소유의 덧없음과 인생의 무상함을 고려하지 않고 부의 축적에만 집중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

마지막 줄은 자신의 가르침 뒤에 숨겨진 더 깊은 영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가 자주 사용했던 일반적인 표현이다.

우측 하단부분 [누가복음 12장 20-21절]은 목사들이 교인들이 헌금을 하도록 유도할 때에 종종 인용되는 구절 중의 하나다.

 

63절은 기독교 교회가 2,000년 동안 천국과 부활을 대가로 십일조와 헌금을 요구해 왔던 것이 얼마나 큰 사기인가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그리고 기독교 교회와 목사들이 [부활과 죄 사함]을 팔아 받은 헌금과 십일조는 모두 그들의 안락한 삶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헤아릴 수 있는 중요한 구절이다.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예수가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영혼과 육체는 무엇인지, 왜 존재하는지, 무엇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엇을 위하여 사용해야 하는지, 나의 영혼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며,

그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때에(그것을 보는 눈을 갖게 될 때에, 성스러운 영혼이 빛으로 가득 찰 때에) 비로소 바로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의 내면과 밖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천국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천국을 찾는다면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그리고 밖에 있음을 예수는 강조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현재라는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고 있다.

 

64. 예수가 말하기를, "한 사람이 손님을 받고 있었다. 만찬이 준비가 되었을 때, 그는 손님들을 초대하기 위해 하인을 보냈다.

그 종이 최초의 사람에게 가서, 그에게 말했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몇몇의 상인들이 나에게 빚을 지었습니다. 그들이 오늘 밤 나에게 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가서 그들에게 상환요구를 해야만 합니다. 죄송하지만 만찬을 사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종은 다음 사람에게 갔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종에게 말하였다: '나는 방금 집을 하나 샀습니다. 그래서 하루 동안 볼 일을 보러 가야 합니다. 저는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종이 또 한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종에게 말하였다: '나의 친구가 결혼합니다. 제가 그 피로연을 마련해 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갈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죄송하지만 만찬을 사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종이 또 한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저의 주인께서 당신을 초청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종에게 말하였다: '나는 최근 큰 농장을 하나 샀습니다. 그래서 소작료를 거두러 가야 합니다. 저는 갈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죄송하지만 사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종이 돌아와서 그의 주인에게 아뢰었다: '당신께서 만찬에 초청하신 분들은 모두 사양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주인이 그의 종에게 말하였다: '길거리로 나아가서 네가 만나는 누구든지 만찬에 올 수 있다고 하면 데리고 오라.'

기업가들과 상인들은 나의 아버지의 자리들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라. "

 

해석 - 64절은 도마복음과 비교해 볼 때 현재 성경의 신약이 얼마나 변질되어 있는가를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구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64절은 55절과 62절, 63절의 내용과 연결되는 구절이다.

64절은 세상사와 물적추구에 몰두함으로써 어떤 기회를 놓치게 되는지를 우화적으로 풀어낸 구절이다.

본문의 '만찬 초대'는 내면의 영적 깨달음의 기회를 의미한다.

(마지막 두 문장:)

만찬에 초대된 이들의 거절로 인하여 부나 지위가 없을지 모르지만 마음을 열고 영적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로 그 기회가 넘어가게 되는데,

주인이 종에게 거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지시하는 장면은 사회적 관심사 혹은 물질적인 관심사 등 세상사를 우선시하면 영적인 깨달음의 기회를 놓칠 수 있음을 암시하며,

"사업가와 상인들은 내 아버지의 처소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장면은 세상적인 일에 몰두하면 영적인 영역에의 접근이나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 두 문장은 64절을 통해 예수가 제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장면이다.

궁극적으로 세상사와 물질적인 추구에만 몰두함으로써 영적인 가르침과 내적 깨달음의 기회를 잃을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가 지난 2천 년 동안 64절과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기독교 선교에 유리하도록 해석하여 "사회에서 덜 중요하거나 영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마치 신의 선택을 받은 것처럼 믿도록 현혹하여 선교활동에 악용해 왔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65. 예수가 말하기를, "포도원을 소유한 선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포도원을 소작농부들에게 빌려주어, 그들이 포도원을 경작하게 하고,

그리고 그는 그들로부터 소출을 거두려 하였다.

그는 그의 종을 보내어, 소작농부들이 종에게 포도원의 소출을 주도록 하였다.

그들은 그의 종을 붙잡아, 그를 때리고, 거의 죽일 뻔하였다. 그 종이 돌아와 그의 주인에게 아뢰었다.

그의 주인이 이르기를, '아마도 그들이 너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구나' 하였다.

그는 또 다른 종을 보내었다. 그러자 소작농부들은 그 종까지도 마찬가지로 구타하였다.

그러자 그 주인은 그 아들을 보내며 이르기를, '아마도 그들은 나의 아들에게는 충분한 존경심을 보일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그 소작농부들은 그가 이 포도원의 상속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붙잡아 죽여버렸다.

귀가 있는 자는 누구든지 들으라!"

 

해석 - 영문번역본 본문의 포도원 농장주는 'good man'으로 표현되고 있고, 소작농부들은 살인을 서슴지 않는 등 매우 폭력적인 농부들로 묘사되고 있다.

'good man'이라는 표현에는 매우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이를테면 소작농부들에 대한 배려, 저렴한 소작료 부과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와 반대로 소작농부들은 소작료를 거두려는 농장주가 보낸 이들에게 폭력과 살인을 행사하는 모습들이 연출되고 있다.(기독교는 이 장면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신이 보낸 선지자들을 박해하는 모습으로 둔갑시켰다.)

이와 같은 장면들을 통해 우리는 소작농부들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오직 포도농작물을 독식하려는 태도를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5절은 농장주와 소작농부들의 대립관계를 다룬 드라마를 통해 소작농부들의 재물(포도수확물)에 대한 집착과 탐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예수의 비유가 잘 나타난 구절이다.

도마복음 65절을 각색한 드라마들이 성경 곳곳에 삽입되고, 이런 구절들이 지난 2천 년간 기독교 교회들에 의해 신이 보낸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박해하는 것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연출되어 왔으며, 더 나아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둔갑시키고 인류구원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하나의 도구로 쓰여 왔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66. 예수가 말하기를,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바로 그 돌을 나에게 보여달라. 그것이야말로 모퉁이의 머릿돌이다."

 

해석 - 66절 역시 도마복음의 많은 구절들처럼 비유법이 사용된 구절이다.

66절은 간과되거나 거부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가치 재평가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는 구절로써,

본문의 '버린 돌'은 사회나 관습에 의해 과소평가되거나 간과되었지만 중요성이나 진실을 지니고 있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상징한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전통적으로 무언가가 세워지는데 근본적이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요소를 가리키다.

이러한 매락에서 예수는 과소평가된 요소들이 실제로는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67. 예수가 말하기를, ""모든 것을 아는 누군가가 여전히 (진리에 대해) 부족함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전혀 모르는 것과 같다." "

 

해석 - 67절 역시 매끄럽게 문장을 재해석하였다.

67절은 내면의 영적인 진리에 대한 온전한 이해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 구절이다.

참된 성취감은 겉으로 보이는 학습수준이나 단순한 지적 이해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내적 성취에 대한 완전함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을 넘어 깊은 자기 만족감이 더해질 때에 이뤄짐을 암시한다.

즉,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도 자신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는 의미다.

67절을 다르게 표현하면,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정도의 진정한 이해가 없다면 하나도 모르는 것과 차이가 없다."라고 할 수 있다.

 

68. 예수가 말하기를, "미움과 핍박을 받을 때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너희들이 핍박을 받는 곳이 어디든 그들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해석 - 68절 역시 매끄럽게 문장을 재해석하였다.

 

당시 예수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율법에 충실한 당시 로마인들이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예수는 당시 유대 율법의 전통과 관련하여 혁신주의자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바탕에 깔고 68절을 봐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줄의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부분은 핍박의 근거가 없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영문번역본을 보면 두 번째 줄에 'find no place'라는 부분이 나온다. 이를 한글로 해석하면 '설 자리가 없다'라는 의미가 된다.

 

나머지 하나는 정신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대한 박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박해를 일종의 정신적인 갈등이나 고통으로 놓고 본다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재물과 지위에 대한 탐욕을 느끼는 감정과 그것을 억누르는 감정이 공존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유의 욕구를 억제하거나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탐욕을 느끼는 내면의 자신에게는 일종의 정신적인 고통으로 이해될 수가 있다.

자신에 대한 이러한 내면적인 고통이나 핍박을 극복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진정한 가치의 세계들을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이 아닐까 한다.

내면적 박해의 부분은 다음 69절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와 같은 면에서 68절은 66절의 모퉁이의 머릿돌과 67절의 자신을 알게 되는 것과 일정 부분 그 맥이 닿아 있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69. 예수가 말하기를, "(아버지에 대한) 내적 갈등을 겪는 그들은 복이 있다. 그들은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갈구하면 그들의 (아버지에 대한) 굶주림은 채워질 것이므로, (아버지를 알고자 하는) 갈망은 복이 있다."

 

해석 - 69절 역시 매끄럽게 문장을 재해석하였다.

69절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도마복음 곳곳에서 자주 등장했던 '아버지'라는 표현들과 같은 의미를 닮고 있다.

즉, "내면에 살아 있는 빛(영혼)"을 의미한다.

첫 번째 줄은 내적 갈등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영적 성장과 지식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줄은 내면의 영적 경험의 중요성과 진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추구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을 강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69절에서 역사적 인간 예수는 '내면의 빛'을 알고자 하면 절박한 심정으로 갈구해야 제대로 알게 될 것이라는 점을 제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다.

69절을 보며 떠오르는 성경의 구절이 있다. 바로 마태복음 7장 7~8절이다.

마태복음 7장 7~8절과 69절을 비교해 보면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들이 신약이란 이름으로 추가되면서 역사적 인간 예수의 훌륭한 가르침이 얼마나 악마스럽게 조작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70.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내면에 있는 것을 끄집어낸다면,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그러나 너희가 너희 내면에 있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너희가 너희 내면에 갖고 있는 그것이 너희를 죽이리라."

 

해석 - 70절 역시 영문번역본을 토대로 매끄럽게 문장을 재구성하였다.

70절은 결론부터 보면 자기 인식의 중요성과 내면의 잠재력 또는 진정한 자아를 이끌어 낼 필요성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진정한 자아 또는 잠재력과 같은 내면에 대한 진정한 자기발견은 인생이 더 의미 있고 목적이 있는 삶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자아발견을 소홀히 하거나 잠재력을 억누르면 의미 없는 삶을 살거나 영적인 사망과 같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밝게 빛나는 빛이 인간의 외적인 생명이라면 영혼은 인간 내적인 생명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인간 내면의 빛이라 할 수 있다.

외면의 빛과 내면의 빛은 인간의 존재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거나 태어남과 동시에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들이라는 것은 엄연한 진리이며,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 존재 인가하면 그 외면의 빛과 내면의 빛이 늘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져 왔기 때문에 그 소중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70절에 등장하는 "인간 내면에 있는 것"이라 함은

예수는 이러한 외면과 내면의 빛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도반들의 내면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러나와야 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세속적인 탐욕과 세상사에 온전히 시간을 할애한 채 살아가는 시체와 같은 인간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내면에 이러한 가치에 대한 탐구의 의지가 없이 삶을 살아간다면 이는 곧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시체와 같은 삶이 되는 것임을 예수는 말씀하고 있다.

 

71. 예수가 말하기를, "내가 이 집을 헐겠노라.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다시 짓지 못하리라."

 

해석 -

외형적으로 볼 때에 성전은 매우 오랫동안 견고함을 유지하고 있어서 허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예수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비유'라는 방식을 도마복음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볼 때에,

71절의 '성전'은 역사적 인간 예수가 살아 있던 당시에 존재하던 외형적 건축물로써의 유대교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수천 년 동안 당시 유대인들의 정신을 견고하게 지배하고 있던 유대율법과 하나님과의 연결을 위한 당시 유대교 형식의 옛 방식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며 예수는 이러한 유대율법과 하나님과의 연결을 위한 옛 방식을 "파괴"하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함을 강조하는 것이라 볼 필요가 있다.

 

71절은 유대교의 율법(성경의 구약)과 성전에 대한 예수의 철저한 부정적 시각을 매우 극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다.

예수가 죽은 후 그의 어록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활자화되고, 예수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소위 기독교 작가들에 의하여 수정에 수정을 거치며 예수를 신격화하기 위해 성경이란 이름이 붙고, 거기에 2,000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종교화된 지금까지도,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이 교회를 세습하고, 교회를 부의 치부 수단으로 만들고, 자신의 재산으로 만들고, 일부 성도들을 상대로 성폭행을 일삼는 것은 기독교 경전은 물론 예수를 하나님의 독생자 라하고 교회와 목사들이 지난 2천 년 동안 주장해 온 것들이 모두 한낱 새빨간 거짓에 불과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자신들도 죽을 운명임을 매우 잘 아는 교회와 목사들 스스로가 신이 진정 있다고 믿고 있다면 그 믿음만으로도 신이 노여워할 일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신을 두려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72.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나의 형제들에게 나의 아버지의 재산을 나에게 분배하도록 말씀해주세요."

그가 말하기를, "선생님, 누가 나를 분배자로 만들었습니까?"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몸을 돌려 물었다, "나는 분배자가 아니다. 그렇지 아니한가?"

 

해석 - 72절의 "분배"를 표현하는 데 있어 영문 도마복음에서는 "divider"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한글로 번역하면 분할, 분열, 분배 등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72절의 '분배'는 16절의 가족주의 분열과 관련한 갈등과는 다르다. 16절이 인정하는 내용이었다면 72절은 부정하는 내용이다.

72절에서 예수는 세상사에서 재판관이나 분배자의 역할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가르침이 세속적인 문제나 부의 분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영과 내적 변화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73. 예수가 말하기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들이 적으니, 그러므로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간청하라."

 

해석 - 73절 역시 도마복음의 많은 구절들처럼 비유법이 사용된 구절이다.

본문의 '추수할 것'이라 함은 영적인 깨달음을 통해 잠재력을 이끌어 내도록 도울 대상을 의미하며, '일꾼'은 영적인 가르침을 돕거나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을 의미한다.

73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9절 본문의 "뿌려진 씨" 그리고 57절 본문의 "좋은 씨앗을 가진 사람" "추수의 날"에 대한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73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당시 예수운동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그래서 점점 사람들이 예수에게 몰려들고 있었다.

예수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관리할 사람들을 더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73절에서 주인(Lord)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달라고 간청을 하라고 했을까...

73절의 '주인'을 영문 도마복음에서는 "Lord"로 표현하고 있다.

Lord는 귀족이나 또는 영주 혹은 도시의 시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사적 인간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 로마제국이 왕성하게 번성하던 기원 후 1-2세기 무렵에는 수많은 도시들이 생겨나면서 매우 굉장한 번영을 누리고 있던 시기였다.

이에 근거하여 볼 때 73절은 기원 후 1세기 초 당시 귀족 혹은 시장이나 영주들이 추수할 일꾼들을 농번기는 물론 농한기에도 계속해서 데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74. 그가 말하기를, "오 맙소사, 여물통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저수조에는 아무것도 없다."

 

해석 - 74절은 여물통과 저수조에 대한 비유가 사용된 구절이다.

여물통 주변에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 거짓 선지자 또는 공허한 약속이나 얄팍한 가르침으로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는 지도자들 주변에 사람들이 많음'을 의미하며,

저수조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영적인 깨달음이 부족함'을 의미한다.

74절의 역사적 인간 예수는 세속적이거나 피상적인 것에 대한 추구보다는 진짜 소중하고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내면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75. 예수가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문 앞에 서 있으나, 신부의 방에 들어가는 사람은 고독한 자다."

 

해석 - 본문을 중요단어별로 의미를 짚어 보면,

문 : 더 깊은 영적 깨달음의 영역에 이르는 것을 상징한다.

고독 : '고독'은 영적 성장과 깨달음이 궁극적으로 개인의 여정이라는 의미와 닿아 있다.

고독한 사람들 : 깊은 자기 성찰 혹은 더 깊은 영적 경험을 위해 진정으로 개인의 여정을 떠날 준비된 사람들을 의미한다.

신부의 방 : 순수함을 간직한 깊은 영적 깨달음의 상태 혹은 영역을 말한다.

 

75절 본문을 도마복음의 다른 구절들과 연결되는 부분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독한 자"는 16절의 "홀로 된 자", 23절의 "하나 된 자", 29절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된 상태(에 도달한 자)", 49절의 "홀로 된 자", 61절의 "분열되지 않은 전체로부터 온 자"라는 의미와 매우 밀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부의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은 22절에서 "아기들이야말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46절에서는 "아기가 되는 자는 나라를 알 것이다"라는 부분과 맥이 닿아 있다.

그리고 예수가 3절과 49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나라"와 75절의 "신분의 방"은 동일한 의미로 볼 수 있다.

 

인간 예수나 소크라테스, 부처, 공자와 같은 보통 인간의 수준을 넘어선 깨달음의 반열에 오른 성인들의 가르침이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에게 있어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부분들일 것이라는 점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75절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닮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75절의 역사적 인간 예수는 더 깊은 영적인 통찰 혹은 깨달음은 모든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많은 준비와 큰 결단이 필요함을 말하고자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76. 예수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나라는 상품을 위탁받은 상인 그리고 진주를 발견한 상인과 같다.

그는 슬기로운 상인이었다. 그는 그 상품을 팔고 자신을 위하여 진주 하나를 샀다.

그러하므로 너희도 좀이 삼키려고 가까이 오지 않고 벌레도 해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썩지도 않고 변치 않는 보물을 찾으라."

 

해석 - 76절 역시 영지주의 전통과 관련된 많은 도마복음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영적 진리에 대한 은유적 비유가 사용된 구절이다.

본문의 단어들을 구체적으로 해석하면,

아버지의 나라 : 영적 진리 또는 깨달음의 영역을 가리킨다.

상인 : 상인은 영적 깨달음이나 진리를 구하는 개인을 상징한다.

상품 : 물질적 소유물이나 세속적인 즐거움을 의미한다.

상품을 팔고 진주를 사는 행위 : 영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과정을 상징한다.

좀이 삼키려고 가까이 오지 않고 벌레도 해치지 못하는 곳 : 썩고 잃어버리기 쉬운 세상 소유물과 비교해 볼 때 영적 진리의 썩지 않음과 영속성을 강조한다.

썩지도 않고 변치 않는 보물을 구하는 것 : 영적인 진리 또는 깨달음을 찾는 것을 말한다.

 

76절은 세속적인 추구보다 영적 성장과 깨달음을 우선시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으며,

즉,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그 가치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오롯이 투자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

 

76절은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갖다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구약(유대교의 경전)을 부정했던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들의 소굴"이라 했던 것을 떠올리면 그러한 사실이 더 분명해진다.

우리는 76절을 통하여 한국 기독교의 목사들이 신도들의 헌금을 내도록 하기 위하여 이용하는 단골 멘트인 "재물을 교회에 받치는 것이 곧 하늘에 있는 천국에 재물을 쌓는 것"이라는 설교가 얼마나 괴이하고 기만적인 설교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77. 예수가 말하기를, ""모든 것들에 존재하는 그 빛은 나의 전부다.(It is I who am the light which is above them all)

(중복) (It is I who am the all( which is above them all))

모든 것은 빛으로부터 비롯되었고, 빛을 향해 뻗어 있다.

나무조각을 쪼개면 빛이 거기에 있고, 돌을 들어 올리면 거기서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해석 - 77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영어원문을 불가피하게 일부 함께 추가하였다.

77절의 핵심은 빛(생명)이 전체 혹은 전부이며, 사람과 돌과 나무 등 그 무엇에게도 단지 존재의 차이가 있을 뿐 각각에게 생명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빛'이라 천명한 것으로 성경을 조작했다.

77절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빛은 나다.(빛은 나의 전부다) 그리고 나는 빛이다(내가 빛의 주인이다)의 차이를 매우 엄중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It is I : 그것(the light)은 나다. (빛은 나의 전부다)

I is It : 나는 (the light)이다. (내가 빛이다)

자칫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이해한다면 77절을 요한복음 8장 12절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두 번째 줄은 첫 구절의 반복이다. 그리고 'the light'과 'the all'은 같은 의미다.

영문 세 번째 줄의 'me'와 네 번째 줄의 'I'는 the light(생명)를 의미한다.

 

77절 후미에 등장하는 나무조각과 돌에 대하여,

사람에게도 나무조각에도 돌에게도 예수가 '빛'이라고 표현하는 생명이 있다.

단지 그 존재형태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람에게 영혼이 있듯이 나무와 돌에게도 각각의 생명이 있는 법이다.

만약 나무조각과 돌에게서 생명이 사라진다면 나무는 장작이 될 것이며, 돌은 흙이 될 것이다.

77절과 연관된 구절을 보면 24절, 50절, 59절, 61절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78.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왜 사막으로 나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혹은 너희들의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처럼 좋은 옷을 입은 누군가를 보려고?

그들이 화려한 옷을 걸쳤다고 진리를 이해할 수는 없다."

 

해석 -78절 첫 줄의 '사막'은 영적인 깨달음에 도전하는 삶의 여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막은 49절의 '고독'과 맥이 닿아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 본질보다는 새로움이나 오락을 추구하는 것을 상징한다.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화려한 옷차림: 부귀영화가 영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방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진리를 이해하지 못함 : 겉으로는 권력과 영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적인 것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은 더 깊은 진리에 대해서는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78절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물질적 부와 사회적 지위가 반드시 영적 진리나 깨달음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영적인 이해와 영적인 진리추구를 통해 외모보다 자신의 삶에서 더 깊은 의미를 찾도록 함에 있다.

 

79. 무리 속의 한 여인이 그를 향해 외쳤다, "너를 낳은 자궁과 너를 먹인 젖가슴이여, 복이 있도다!"

그가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잉태한 적이 없는 자궁과 젖을 먹인 적이 없는 젖가슴 (역시) 복이 있다'라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참되게 지킨 자들이여 복이 있도다!".

 

해석 - 79절의 문맥을 매끄럽게 번역하기 위하여 특히 마지막 부분의 순서를 바꾸었다.

79절에서는 영문을 보면 예수를 가리킬 때 jesus 대신 him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복되다" "복이 있다"라는 표현은 18절과 19절, 49절, 54절, 58절, 68절, 69절, 79절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79절은 여성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79절을 접함에 있어, 아이를 낳고 젖을 먹여 키우는 여성을 예수가 경시하고 있는 것이 아나라는 사실을 매우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79절에서 예수는 단순히 아기를 낳고 기르는 것에서 느끼는 자긍심 외에도 또 다른 영역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지혜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외면과 내면(영혼)의 빛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의 가치와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탐욕을 극복하는 삶을 사는 것을 통하여 모든 여성이 자긍심을 느끼게 될 것임을 예수는 설파하고 있다.

79절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지킨다" 함은 한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세속적인 탐욕의 극복을 통한 인간 내, 외면에 존재하는 빛의 존재 의미를 깨닫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본다.

50절에서 예수는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80. 예수가 말하기를, "세상이 물질만능주의로 가득한 것을 이해하게 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세계에서 단지 시체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시체를 발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세계의 으뜸이다."

 

80절은 56절과 동일한 내용이 반복된 구절이다.

해석 - 80절의 '세상'은 물질만능주의로 가득한 세상을 의미하며, '시체를 발견한다'는 것은 깊은 통찰력으로 물질만능주의 추구와 일시적인 쾌락과 인생무상으로 세상이 가득한 것을 느끼게 될 때 마치 영적인 생명이 없는 껍데기 몸을 보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80절 역시 예수 특유의 비유가 들어가 있는 구절이다.

80절은 당시 역사적 인간 예수가 물질주의적 욕망에 깊이 얽혀 있는 사람과 세속적인 추구의 공허함에 대해 이러한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을 매우 다른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는 구절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역사적 인간 예수는 물질보다 영적인 것을 우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1. 예수가 말하기를, "풍요롭게 된 자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라. 그리고 힘을 가진 자로 하여금 그것을 부정하게 하라."

 

81절 재번역 : 예수가 말하기를, "정신적 깨달음을 통하여 나라(해탈, 열반, 해탈, 왕국)의 경지에 오른 자는 육체를 지배하는(다스리는) 지배자가 된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는) 힘을 가진 자는 그 힘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해석 - 81절의 "(정신이) 풍요롭게 된 자로 하여금 (육체를) 다스리게 하라" 이 부분은 29절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는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육체"는 56절에서 등장하는 세속적인 탐욕에 빠져 있는 시체와 같은 육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풍요로운 상태" 즉, 정신적 깨달음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경지는 3절의 "나라"와 동일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는 영혼이 육체를 다스릴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항상 겸손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82. 예수가 말하기를, "누구든지 나와 가까이 있는 자는 불과 가까이 있는 것이니라.

그리고 누구든지 나로부터 멀리 있는 자는 나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니라."

 

해석 - 82절의 "불"은 10절의 "불"의 의미와 같은 "천국운동의 불씨"를 의미한다.

82절은 10절에서 예수가 던진 천국운동의 불씨를 구체적으로 다시 드러내고 있는 구절이다.

82절의 예수는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자는 내면에 천국운동의 불씨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 하고 있다.

그렇지 아니하고 천국운동의 불씨를 내면에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나라에 다가갈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82절에서 "나라"는 "깨달음(득도, 열반, 해탈)을 통해서만 인지할 수 있는 영혼(정신)의 영역"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며, 다르게 표현하면 천국, 왕국, 세계로도 표현될 수 있다.

70강의 도올 선생에 따르면, 깨달음에 대하여 더 자세히 설명하면 "깨달음"은 완전한 깨달음과 불완전한 깨달음이 있다. 완전한 깨달음은 살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무여열반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82절에서의 나라는 "불완전한 깨달음" 혹은 "유여 열반"의 상태라 할 수 있다.

 

83. 예수가 말하기를, "모습들은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 모습들 속에 있는 빛은 아버지의 빛의 모습 속에 가리어져 있다. 아버지도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모습은 항상 아버지의 빛 속에 숨겨져 있다."

 

해석 - 83절은 29절과 50절과 관련 있는 구절이다.

83절의 '모습'은 영문으로는 image로 통일되어 표현되고 있지만, 의미를 해석 함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의미를 닮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 나오는 '모습들'의 모습은 눈으로 확인이 가능한 것을 의미하며, 나중에 등장하는 '빛의 모습'의 모습은 눈에 드러나지 않는 형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83절에서 예수가 전하고자 한 것은 밖으로 드러난 외면의 모습이 아닌 그 안에 감춰진 내면의 형상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99.9%의 인간은 누구나 상대방을 평가함에 있어 그 상대방의 겉모습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상대방의 겉모습을 통하여 상대방을 평가하는 주체는 자신의 외면이 아닌 자신의 내면, 영혼의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사물이나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주체가 자신의 내면 혹은 영혼이라면 평가의 대상이 되는 객채 또한 동등하게 다른 사람의 내면의 영역, 영혼의 형상이어야 동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83절은 예를 들면 29절의 "영혼이 육신을 통하여 존재케 되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사물이나 상대방의 실체를 알아보는 안목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84.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가 (하나님을) 닮은 너희 모습을 볼 때에, 너희는 행복하도다.

그러나 너희가, 너희 이전에 존재한, 그리고 죽지도 아니하고 보이지도 아니하는 너희 형상들을 볼 때에는, 과연 너희가 얼마나 감내할 수 있으랴!

 

해석 - 84절의 '형상'은 83절의 나중에 등장하는 '모습'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84절의 첫 줄은 당시 유대인들이 믿던 유대 율법(현재 성경의 구약)적인 관점을 꾸짖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다.

두 번째 줄에서 예수는 첫 줄에서의 외형적 모습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그 생며의 빛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에 세속적인 탐욕과 외면의 모습에 충실했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느끼면서 갖게 되는 정신적 괴로움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은 2절과 그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85. 예수가 말하기를, "아담은 거대한 힘과 거대한 부로부터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너희에게도 합당치 아니하다.

만약 그가 합당한 자라고 한다면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해석 - 85절은 38절, 63절을 통하여 삶과 죽음의 의미, 그 차이에 대하여 예수가 말씀했던 것의 또 다른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85절은 당시 유대교의 율법(현재 성경의 구약 부분)을 부정하던 예수가 구약에 등장하는 '아담'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었는가를 매우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필요 이상의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탐욕과 권력의 욕구를 추구하는 인간을 상징하는 아담.

예수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낼 수 없는, 육신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진실로 추구해야 할 대상이나 진리가 '아담'이 아님을 깨우치고 있다.

 

86. 예수가 말하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는데, 인간의 자식인 나는 머리를 뉘어 안식할 곳조차 없도다."

 

해석 - 86절은 우선 15절에서 예수가 언급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구절이다.

또한 86절에서 예수는 모든 권세로부터 자유로운 자기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8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자기부정'을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리고 86절은 42절의 '방랑하는 자'를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86절은 "son of man"이란 의미를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86절의 "인간의 자식(인자)"은 영문으로는 "son of man"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표현은 성경에도 많이 등장하고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son of man(인간의 자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인간 예수가 어떤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는지를 알고, 그가 사용했던 언어로 번역했을 때 son of man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러 문헌들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 예수가 '아람어'를 기본 언어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아람어'는 "아랍어"와 매우 비슷한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번역의 편의상 son of man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영문 'son of man'을 우선 아랍어로 번역하면 'ابن آدم'가 되며, 'ابن آدم'을 영문으로 재번역하면 'Adam's son'이 되며, 이를 한글로 번역하면 '아담의 아들'로 번역이 된다.

결과적으로 "(영문) son of man = (아랍어) ابن آدم = (영어) Adam's son = (한글) 아담의 아들"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얻은 결과에서 '아담'이 갖는 상징성을 다시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아담'은 쾌락과 세속적인 탐욕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인간을 상징한다.

위와 같이 '인간의 아들'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간의 자식(인자)"이라는 표현들이 지난 2,000년 동안 복음서의 기자와 학자들 사이에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던 '인자 담론'의 예수, '신아 아들' 예수가 자신을 낮춰 부르는 의미와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은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서도 이미 곳곳에서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는 사실이지만 특히 15절의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 그리고 86절의 쾌락과 세속적인 탐욕을 추구하는 평범한 인간의 자식이란 의미로서 "인간의 자식"이란 표현을 예수가 직접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성경에 등장하는 "인자"라는 표현들 또한 위와 같은 시각에서 그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86절의 '안식'의 의미를 정신적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결론적으로 86절의 예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정신적 방랑생활을 하고 있으나 완전한 깨달음,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없음을 탄식하고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죽으면 다시는 볼 수 없는 한낱 인간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예수가 정말로 기독교가 2,000년 동안 인류를 세뇌하는데 이용해 왔던 '신의 아들'이었다면, 예수는 86절에서와 같이 '안식할 곳이 없다'는 표현을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안식할 곳'을 실제로 누워 쉬는 잠자리라고 이해하면 86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하여 끊임없이 탐구하는 방랑을 통하여 "빛의 존재"를 깨닫고 해탈의 경지에 올랐으나 실제 자신이 누리는 권세는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누워 잘 곳도 조차 없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를 통하여 예수가 전하고자 한 것은 높은 지위와 권세를 갖더라도 겸손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86절은 현재 교회와 목사들이 누리고 있는 권세가 예수의 가르침과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 확연히 드러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87. 예수가 말하기를, "한 몸에 매달리는 그 몸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리고 이 양자에 매달리는 그 영혼은 얼마나 비참한가!"

 

해석 - 87절은 29절, 55절, 81절에서 예수가 전달하고자 하는 부분과 맥이 닿아 있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87절을 통하여 예수는 육신을 위한 쾌락과 큰 부와 권력에 대한 속세의 탐욕을 추구하는 것으로로부터 벗어나 내면의 빛과 주변의 빛의 존재 가치를 알아보고, 궁극적으로 안식(열반)의 상태에 수 있도록 끊임없이 탐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87절에서 예수는 29절에서 언급하였던 "영혼이 육신의 몸을 빌어 존재케 되는 상태가 되도록 계속해서 노력해야 함을 설파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88. 예수가 말하기를, "천사들과 예언자들이 너희에게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그런 것들을 너희에게 주리라.

그때엔 너희도 보답으로, 너희가 세상에서 발견한 그런 것들을 그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너희 자신에게 자문해 보라, 언제나 그들은 다시 와서 그들 자신의 것을 가져갈 것인가? 라고."

 

해석 - 88절을 의역하여 보았다.

88절을 조금 더 매끄럽게 하기 위해서는 전후 문맥 상 'have'를 "경험하다", 'take'를 "속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88절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 천사와 예언자(라고 하거나 , 혹은 불리는) 자들이 너희에게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가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는 그런 것들을 전해 줄 것이다.

그때엔 너희도 보답으로, 너희가 경험한 것들을 전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 자신에게 자문해 보라, 언제쯤이면 그들이 그들만의 것으로 속이려 하게 될 것인가?라고." ]

 

88절은 유대인의 율법(구약)을 부정했던 인간 예수가 당시 천사와 예언자들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다.

88절에서 예수는 예언자 혹은 천사들이 전하는 것들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며, 경험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도반들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예수는 천사와 예언자들이라 하는 자들이 과연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갖고 도반들을 속이려 할 수 있는 때가 오기는 할 것인지 의문을 표현하고 있다.

88절은 구약의 천사, 예언자들의 소리가 얼마나 공허한 메아리인가가 잘 드러나 있는 구절이다.

 

89. 예수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너희는 잔의 겉만을 씻으려 하느뇨?

안을 만드신 이가 또한 겉을 만드신 이라는 것을 너희는 알지 못하느뇨?"

 

해석 - 89절은 22절, 29절과 관련되는 구절로써, 율법 특히 이원론적인 유대인의 율법을 부정하는 예수의 사상이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89절을 통하여 예수가 큰 부와 권력에 대한세속적인 탐욕의 욕구와 같은 외형적인 치장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89절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는 자신의 외면, 외형의 모습에만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내면의 위대함, 가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위하여 더욱 노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90. 예수가 말하기를, "나에게로 오라!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다스림은 부드럽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안식을 발견하리라."

 

해석 - 90절을 이해하기 앞서 우리는 먼저 두 가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자신의 설교에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대하려고 했다는 점.

둘째, 예수는 자신이 누군가를 구원하거나 안식을 줄 수 있는 인물로 비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90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인간 예수가 살던 당시의 시대상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시 갈릴리 지방의 민중들은 정부가 부과하는 엄청난 세금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고된 멍에를 짊어지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90절에서의 예수는 당시 민중들을 상대로 설교를 하면서 자신에게 설교를 듣는 것이 그들에게 큰 부담(멍에)을 주지 않을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예수는 민중들 각자의 안식(깨달음)은 스스로 찾는 것이라는 사실을 선언함으로써 예수 자신은 결코 구원자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 있겠다. 예수는 민중들이 밥 먹는 법을 가르쳐 줄 뿐, 밥을 떠 먹여 주는 역할자는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90절은 기독교가 지난 2,000년 간 예수를 구원의 상징으로 이용하여 왔다는 사실과, 구원론이 신자들을 종교의 권력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도구였음이 분명하게 드러난 구절이다.

 

91.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을 믿고자 하오니, 당신이 과연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말하여 주소서. "

그께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하늘과 땅의 표정을 읽을 줄 알면서 너희 앞에 서있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러니까 너희는 바로 이 순간을 읽을 줄을 알지 못하는도다."

 

해석 - 91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반들이 언급한 "믿음"이란 것은 어떤 것을 의미했을 것인가 그리고 91절의 마지막 줄에 나오는 "바로 이 순간을 읽을 줄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했는가라고 했던 예수의 마음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당시 도반들은 이미 유대교의 율법, 즉 현재 성경의 구약 부분에 익숙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91절의 도반들이 말한 "믿음"이라는 것은 민수기, 시편과 구약에 등장하는 "믿음" 이를테면 "영구적인 피난처" 또는 "구세주"와 같은 의미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구약의 "믿음"에는 현실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영구적이고 확신적인 구원자로서의 신뢰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해야 두 번째와 마지막 줄에서 예수가 가슴을 쥐어뜯듯 답답해하는 듯한 표현을 왜 저렇게 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91절의 예수는 (눈앞에 없는) 하늘과 땅의 이치는 알아보면서도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예수 자신에게서 듣고 깨달으려 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믿음을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도반들을 꾸짖고 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91절의 예수는 자신은 메시아가 아님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에게서 믿음을 보려 하지 말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91절에서 예수가 도반들에게 하고자 한 말씀의 의미는,

예수 자신은 도반들에게 믿음을 주는 메시아가 아니었으며, 눈 앞에 있는 자신이 하는 말을 도반들 각자가 영혼의 귀로 듣기를 바라는 것이었고, 바로 그 순간에 스스로 (내면의 빛, 생명의 빛, 나라, 천국에 대하여)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를 바란 것이라 할 수 있다.

91절은 예수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바울이 예수가 죽고 나서 만들었다는 기독교가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를 메시아, 믿음의 상징으로 신격화해 왔던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구절이다.

 

92. 예수가 말하기를, "찾으라! 그러면 너희는 발견할 것이다.

예전에 나에게 물어본 것에 관하여 나는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바로 그것들을 말하려 하나 묻지 않고 있다"

 

해석 - 92절은 91절에서 강조했던 것을 또다시 다른 표현으로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

92절은 진리, 생명, 빛, 구원과 같은 믿음은 누군가 주는 것이 아닌 평생에 걸친 끊임없는 탐구와 고통의 결과 스스로 깨우치고 알게 되는 대상임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구절이다.

오늘날 성서는 예수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수많은 복음서 기자들에 의하여 수백, 수천 번의 수정을 하면서 애초의 의미와는 매우 다르게 변절된 상태다.

92절과 유사하지만 매우 다른 형태로 변질된 마태복음 7장 7절 :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92절은 4 복음서가 역사적 인간 예수의 말씀을 얼마나 모욕적으로 변절시켰는가를 매우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구절이다.

교회는 마태복음 7장 7절과 같은 구절을 성도들의 충성과 헌금유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매우 끔찍하고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92절은 사지로 기어 기껏 살아야 100년도 살지 못할 신세이면서 성서와 교회의 꼬임에 빠져 2,000년 동안 아무도 받은 적 없는, 본 적이 없는 것을 구하겠다고 일 평생을 천국의 달콤함과 같은 시간과 재물을 교회에 갖다 바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어리석은 짓인가를 깨닫게 하는 구절이다.

 

93. "(예수가 말하기를,) " 거룩한 것들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 그들이 그것들을 똥거름 더미에 던지지 않도록 하라. 2 진주들을 돼지들에게 주지 말라. 그들이 그것들을 진창 속에 밟지 않도록 하라."

 

해석 - 93절의 예수는 "자신에게서 들은 것을 아무에게나 전해서는 안 되며, 진리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에게만 전해줄 것을 강조하고 있다."

93절은 교회의 막무가내식 전도행위가 역사적 인간 예수의 말씀과 얼마나 괴리가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94. 예수가 말하기를, "찾는 자는 발견할 것이다.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다."

 

해석 - 92절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

92절은 진리에 대한 믿음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고자 하는 평생에 걸친 끊임없는 탐구와 그 고통의 결과로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구절이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마치 예배에 대한 출석과 헌금을 해야 믿음이 있는 것이며, 영생을 얻고, 복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으나 이와 같은 것이 역사적 인간 예수의 말씀에 견주어 볼 때에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는 구절이다.

 

95.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가 돈을 가지고 있다면, 이자 받을 생각하고 빌려주지 말라. 차라리, 그 돈을 너희가 다시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주어버려라."

해석 - 95절은 예수가 어떤 마음으로 도반들에게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가르쳤는가 하는 것이 잘 드러난 구절이다.

예수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베풀 때에는 무언가 기대하지 말고 베풀 것은 말씀하고 있다.

95절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죽음 후에 하늘에서 받게 될 영생의 면류관을 위하여 교회에 헌신하고, 매주 헌금을 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목사들의 설교가 얼마나 위선적인가 하는 것이다.

 

96. 예수가 말하기를, " 아버지의 나라는 한 여인과도 같도다.

그 여인은 아주 소량의 효모를 가져다가 밀가루 반죽 속에 숨기어, 그것을 많은 수의 빵으로 부풀리었도다.

귀가 있는 자는 누구든지 들어라!"

 

해석 - 96절은 예수는 자신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도반들이 자신의 이야기(천국운동)를 어떻게 전파했으면 하는지에 관하여 우회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다.

96절을 통하여 도반들이 자신에게서 들은 것을 요란스럽게 전파하고 다니는 것을 예수가 탐탁지 않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는 단지 많은 숫자의 제자들보다 차라리 역할을 충실히 하는 제대로 된 한 사람의 제자를 더 중요시했던 모양이다.

밀가루를 많은 수의 빵으로 부풀리게 하는 능력을 가진 효모.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효모는 요란스럽게 자신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은근하고 지속적으로 꽤나 열심히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할 뿐이다.

96절은 예수는 위와 같은 효모의 역할처럼 비록 소수의 제자들일지라도 그들이 소리 없이 계속해서 천국운동을 세상에 펼쳐주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96절과 유사한 케이스를 107절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97. 예수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나라는 밀가루를 가득 채운 동이를 이고 가는 한 여인과도 같다.

그녀가 먼 길을 걸어가는 동안, 이고 가는 동이의 손잡이가 깨져서, 밀가루가 새어 나와 그녀가 가는 길가에 흩날려 뿌려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문제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 여인이 집에 당도했을 때, 그녀는 그 동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것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해석 - 97절은 예수가 계속해서 강조했던 큰 부와 권력에 대한 세속적인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진정한 빛의 가치를 알게 되며, 주변과 내면에 이미 존재하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천국을 발견하게 된다는 천국운동의 의미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63절에서 예수가 하시고자 한 말씀과 맥이 닿아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97절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는

첫째, 우리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천국(나라)은 부자이어야 갖는 것도 아니며, 죽어서야 얻게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진정한 천국이란 97절에 등장하는 여인이 밀가루를 가득 채운 동이를 이고 길을 가는 동안에 하였을 상상, 즉 집에 가서 그 밀가루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먹는 행복한 상상을 하는 그 시공간에 있다는 것이며,

둘째, 97절에서의 '나라'는 살아 있는 삶 속에서의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지, 기독교가 흔히 교세 확장이나 교인관리에 이용해 왔던 죽어서나 만나게 되는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충실한 신앙생활과 열심히 납부하는 십일조만이 하늘나라에 복을 쌓는 것이라고 하는 목사들의 괘변과는 매우 다른 개념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98. 예수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나라는 엄청난 강자를 죽이려고 노력하는 사람과도 같다.

집에 있을 때 그는 그의 칼을 뽑아, 자신의 팔이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를 시험하기 위하여, 벽 속으로 세차게 찔러 넣었다. 그러자 그는 그 강자를 죽이고 말았다."

 

해석 - 98절에서 예수는 천국이라는 것이 늘 우리 곁에 혹은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노력 없이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전하고 있다.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예수가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시피 천국의 발견은 평생에 걸친 끊임없는 탐구와 큰 부와 권세에 대한 세속적인 탐욕을 절제하여야 가능하게 된다.

천국을 알아보게 된다는 것이 매우 쉽지 않은 일이라는 의미다..

약자가 엄청난 강자를 죽이기 위하여 오랜 기간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의미는 7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99.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형제들과 모친이 밖에 서있나이다."

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나의 형제들이요 나의 모친이니라. 이들이야말로 나의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이니라."

예수가 말하기를,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행하는 이들이 나의 형제이며 나의 어머니이다. 그들이 내 아버지의 왕국에 들어갈 자들이다."

 

해석 - 99절에서 예수가 말하고 있는 가족은 혈족의 개념이 아니다.

55절에서 예수는 "가족을 미워하지 않는 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자"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고 있다. 이 말씀은 내면에 존재하는 생명의 빛(천국) 알아보기 위한 끊임없는 탐구를 예수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스스로 감당해야 것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어야 그 자격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55절에서의 예수 말씀과 연계시켜 보면 99절은 예수에게 가족은 혈족으로써의 가족이 아닌 내면에 존재하는 천국(빛, 생명)을 알아보기 위한 끊임없는 탐구를 같이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천국을 함께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가족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0. 그들이 예수에게 한 개의 금화를 보이며, 그에게 말하였다: "카이사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세금을 요구하나이다."

그께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 카이사의 것들은 카이사에게 주어라.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에게 주어라. 그리고 나의 것은 나에게 주어라."

 

해석 - 72절과 함께 보면 100절에서 예수 말씀의 의미를 헤아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72절에서 예수 자신은 재산이나 물건의 소유관계를 정해 주는 역할을 하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72절과 같은 생각을 가진 예수에게 사람들이 '카이사의 세금 징수'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는지를 묻자, 그 질문에 대한 예수의 우회적인 답변을 기록한 것이 100절이다.

100절은 겉으로 드러난 대화 자체보다는 문맥 속에 감춰진 부분을 드려다 볼 필요가 있다.

 

나는 다음 부분을 직설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것은 나에게 주어라"]

이 부분에서 우리는 "나"라는 대상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나'라는 대상을 예수 자신이라고 해석할 수는 있겠으나 이것은 매우 엄청난 해석의 오류일 수도 있다.

예수가 사용한 "나"라는 것은 질문한 바로 그 사람을 의미한다고 해석해야 문맥이 자연스럽게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더 설명하면,

예수는 살아 있을 당시 종교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역사적 인간이었다.

11절, 38, 63절에서도 나타나듯이 '죽음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죽는 순간 다시는 살아 있는 자신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며 당시 예수는 부활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100절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가 사용한 "나"라는 것이 가리키는 대상이 예수 자신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하여 매우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예수가 사람들이 가진 것 중 일부는 자신의 것이므로 예수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왜?...

자신은 앞으로 수천 년 동안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릴 신적인 존재이니까?

그래서 기독교는커녕 복음서가 세상에 나오기 도 전에, 종교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던 예수가 이런 이율배반적 말씀을 했다?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한결 같이 보이고 있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을 통해 판단할 때 예수가 그랬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추론이라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은 의미라고 해석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너 자신의 것은 너 자신이 가져라"

 

이렇듯 구약을 부정하고, 유대교의 천국을 부정했던 예수가 사람들에게 "어떤 것은 너희 것이고, 어떤 것은 카이사의 것이고, 어떤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였을 리가 없다.

 

두 번째 줄, 예수의 답변 부분을 해석함에 있어, 앞부분에 "너희들이 구분할 수 있다면"이라는 문구를 넣어서 해석해야 예수가 어떤 것을 전하고자 하는 것을 헤아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의 답변 부분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을 하는 이들을 예수가 일견으로는 훈계하는 것일 수 있고, 일견으로는 비꼬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01. 예수가 말하기를, "내가 증오하는 것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증오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의 도반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의 도반이 될 수 없다.

나의 (가짜) 엄마는 거짓을 주었지만 나의 참된 엄마는 나에게 생명을 주었다."

 

해석 - 101절의 첫 번째 줄은 55절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55절을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

두 번째 줄은 첫 번째 줄에서의 예수의 각오? 의지? 그런 것과는 별개로 그래도 부모님은 언제나 사랑하고 공경해야 할 존재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세 번째 줄의 영문에는 앞부분이 생략되어 있는 형태이며, 한글 번역분은 뒷부분에서 앞부분의 의미를 유추하여 보충한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가짜 엄마'라는 것은 세속적이며, 육체적인 의미에서의 부모를 의미하여, '진짜 엄마'라는 것은 예수가 생명으로써의 빛으로 표현했던 존재의 근원으로써의 부모를 의미한다고 보인다.

'가짜 엄마가 거짓을 주었다'는 '은 사망으로 인하여 끝나는 육체의 유한함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부분은 11절과, 63절에서의 예수의 말씀과 맥이 닿아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참된 엄마가 생명을 주었다'는 것은 자신의 육체가 죽어 사라져서 볼 수 없더라도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을 생명으로써의 빛의 영속성과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다.

 

102. 예수가 말하기를, "부끄러워할지어다! 바리새인들이여. 그들은 소 구유에서 잠자고 있는 개와 같기 때문이다.

개는 여물을 먹지도 않으면서 또 소들로 하여금 여물을 먹지도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해석 - 도마복음에서 예수가 '바리새인'을 비판하거나 언급한 것은 39절과 102절이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수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일반 갈릴리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였고 갈릴리 사람들을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로 여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예수가 도반을 비롯한 여러 대중을 상대로 설교를 하는 것을 사사건건 바리새인들이 방해를 하였을 것이라 능히 짐작해 볼 수 있으며, 예수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39절이나 102절에서와 같은 말씀으로 꾸짖거나 비판했을 것이다.

 

103. 예수가 말하기를, "도둑놈들이 어느 시점에 어디로 들어올지를 미리 아는 자는 복되도다!

그는 일어나서 그의 중요한 자산들을 점검하고, 도둑놈들이 들어오기 전에 자신을 무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해석 - 102절의 '도둑'은 7절의 '사자' 21절의 '도적'이 시사하는 것과 동일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03절에서의 '도둑'을 거대한 부나 높은 직책과 같은 속세에서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을 취하고자 하는 내면의 욕망이라 한다면 103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볼 수도 있다.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세상의 것들을 미리 알고 그것에 대한 욕구를 절제할 수 있도록 자기수양을 통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 현명한 자들이다.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도 그렇지만 103절에서 예수는 속세에 의한 지배, 세속적이며 물질적인 욕구로부터 벗어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비로소 자신의 밖에 그리고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의 가치를 알게 되는 탐구를 시작하게 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104. 그들이 예수께 가로되, "오소서! 오늘 같이 기도합시다. 그리고 같이 금식합시다."

예수가 말하기를,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저질러단 말인가? 또한 내가 어떻게 파멸되었단 말인가?

차라리, 신랑이 혼방을 떠난다면, 그제야 사람들로 하여금 금식하고 기도케 하라."

 

해석 - 104절은 유대교의 경전, 토라를 부정했던 예수의 사상이 그대로 드러난 구절이다.

당시 금식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의무로 여기고 있었다.

장소적 개념의 천국을 부정하고, 천국은 자기 주변과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예수에게 있어 당시 유대인들의 금식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104절 후미에 등장하는 "혼방"은 75절에 등장했던 혼방과 같은 개념이다.

104절의 예수는 분열되지 않은 자아의 공간에 있는 자들 즉, 천국(나라)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이들은 그러한 깨달음을 부정하지 않는 한 유대교의 경전인 토라에 맞춰 금식과 기도를 할 필요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105. 예수가 말하기를, "(세속적) 아버지와 엄마만을 아는 자는 누구든지 창녀의 자식이라 불릴 것이니라."

 

해석 - 105절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엄마는 55절에 등장했던 아버지와 엄마와 같은 대상이다.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천국운동의 핵심을 "세속적인 탐욕을 극복하고 끊임없는 탐구를 통하여 내면과 주변에 존재하는 생명(빛)의 가치를 깨닫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29절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예수가 허례허식이나 세속적인 것을 멀리했으며, 내면적인 깨달음을 중시했다는 의미다.

 

105절에 등장하는 창녀는 영어로 "whore" "harlot"로 변역 되고 있다.

이 중에서 whore에서 파생된 whoredom이란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성서적 의미로 우상숭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105절의 '창녀의 자식'을 '우상숭배하는 자의 자식'으로 번역을 해볼 수도 있다.

즉, 105절의 창녀는 흔히 사용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을 갖고 있다.

더 나아가서 '창녀의 자식'을 106절의 '사람의 자식'과 반대의 의미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창녀의 자식은 (영혼적인) 내면적인 것보다는 외형적인 모습, 제식적인 것을 중시하는 경우를 비틀어 표현한 것이라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105절의 '세속적 아버지와 엄마만을 아는 자'는 62절의 "합당한 자들"의 반대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육체적으로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와 엄마만을 안다면 이는 자신과 함께 하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의미다.

 

또한 105절을 자신을 낳아 준 부모와의 내면적인 교감을 강조한 것으로 접근하여 해석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105절은 예수가 자신의 부모와의 내면적인 교감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결론적으로 105절은 예수가 자신이 도마복음을 통해 계속 강조한 부분들을 육체와 정신(내면, 영혼)의 관점에서 설파하고 있는 구절이다.

 

106.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는 너희는 사람의 자식들이 될 것이니라. 그리고 너희가 '산이여! 여기서 움직이라'라고 말하면, 산이 움직이리라."

 

해석 - 106절은 105절과 같은 선상에서 보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구절이다.

106절에서 예수가 말하는 '둘'이라 함은 '육신과 영혼'을 의미한다.

예수가 내면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했는지에 대하여는 도마복음에서 여러 차례 드러난 바 있다.

대표적인 부분이 29절에 등장하는 "영혼이 육신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예수는 제자들이 이러한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수 자신과 같이 내면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된 것이라는 뜻에서 "사람의 자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후미에 등장하는 산을 움직이는 부분은 실제로 산이 움직인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눈앞 보이는 산이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엄청난 변화를 내면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107. 예수가 말하기를, 왕국은 100 마리 양을 지키는 목자와 같다. 그중 가장 큰 것이 길을 잃으매 99 마리를 방치한 채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서니, 고생 끝에 그 한 마리를 찾고 이르기를 '나머지 99 마리 보다 너를 더 사랑하노라'

 

해석 - 107절의 '목자'는 96절의 '여인'과 닮은 의미를 갖고 있다.

소량의 효모를 이용하여 밀가루를 많은 수의 빵으로 크게 부풀리는 여인이나 가장 큰 양을 99마리 보다 더 사랑하는 목자나 모두 나라(천국)이라고 예수는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107절은 예수는 양적으로나 숫적인 것보다는 진짜로 천국운동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그것이 양적으로 작더라도, 혹은 숫적으로 단 한 개이더라도 그것에 더 큰 의미를 두었음 알 수 있는 구절이다.

 

108. 예수가 말하기를, "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나와 같이 되리라. 나 자신 또한 그 사람과 같이 되리라. 그리고 감추어져 있는 것들이 그 사람에게 드러나게 되리라."

 

해석 - 전반부는 예수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실천하면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됨을 말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는 '나와 같이 되리라'의 의미를 자신과 함께 수행하기에 합당한 자가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후반부의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 함은 깨닫지 못하여 보지 못하는 상태의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50절에 등장하였던 생명이라 표현할 수 있는 내면의 빛과 같은 것이 있다.

깨달음을 얻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알 수 있게 되고, 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 부분은 5절에서도 등장하였던 부분이다.

 

109. 예수가 말하기를, "나라는 그의 밭에 한 보물이 숨겨져 있는데도 그것이 거기에 있는 줄을 모르는 한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에 그는 그 밭을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 아들 또한 보물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했다. 그 아들은 그 밭을 상속받은 후에 곧 팔아버렸다.

그 밭을 산 사람은 밭을 갈았고 그 보물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누구에게든지 이자를 붙여서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해석 - 109절은 3절, 96절, 97절에 등장했던 천국으로써의 '나라'의 또 다른 표현의 구절로써, 지금도 예수가 살아 있다면 기독교의 천국 보물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대표적 구절이라 했을 것으로 보일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구절이다.

109절의 핵심은 첫 줄에 있다.

즉, 세속적인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에 비로소 나라를 발견하게 됨을 예수는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말씀이 거대 기독교 자본권력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성서 기자들에 의하여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가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거대한 부의 탐욕에 눈이 멀은 나머지 자기 주변과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천국(나라)을 발견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 했던 예수의 말씀을 성서기자들이 왜곡시켜 성서를 조작함으로써 교회와 목사들이 이를 이용하여 신도들을 상대로 모든 재산을 예수와 하나님으로 포장된 교회에 갖다 바치면 미래에 획득하게 될 보물인 천국을 그 대가로 얻게 된다는 해괴한 사기를 치는 상황들이 계속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110. 예수가 말하기를, "세상을 발견하여 부자가 된 자는 누구든지, 그로 하여금 세상을 부정케 하라."

 

해석 - 110절에는 "세상"이란 단어가 두 번 등장하는데 두 개의 세상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부터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앞부분의 '세상'은 도마복음에서 예수가 나라(천국)로 표현했던 그 세상을 말한다. 뒷부분의 세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속적인 탐욕에 찌든 '세상'을 말한다.

29절을 보면 '부유함'이란 단어를 예수가 사용하고 있다. 이는 110절 앞부분의 '부자'라는 단어와 일치한다.

이를 토대로 110절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누구든지 영혼이 몸으로 존재케 되는 경지에 이르러 즉, 나라(세상)를 발견하여 진짜 부자가 된 자는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재화 같은 것으로 부자와 가난을 결정짓는 그런 세상을 부정해도 된다."

 

111. 예수가 말하기를, "하늘들과 땅이 너희 면전에서 두루 말릴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로부터 살아있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아니하느뇨?: "자신을 발견한 자는 누구든지, 이 세상이 그에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해석 - 111절은 2절 그리고 56절과 62절과 맥이 닿아 있는 구절이다.

111절은 2절, 크게 두 개의 문장으로 이뤄져 있으며, 첫 번째 문장은 또다시 두 개로 쪼개 볼 수 있다.

첫 번째 문장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러나'라는 단어다.

'그러나'를 이용했다는 것은 첫 문장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서로 반대되는 상황임을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늘들과 땅이 면전에서 두루 말린다는 것은 사람이 숨을 멈추는 죽음의 순간에 눈을 감는 것 즉,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해야 첫 문장의 해석이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죽음을 경험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예수의 가르침을 통하여 내면과 밖에 존재하는 세상(나라, 천국)을 발견한 사람들은 육신이 정신을 지배하고, 세속적 탐욕의 욕구에 지배당하는 시체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게 된다.

두 번째 문장은 56절과 연관되는 부문으로써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세상(나라, 천국)을 발견한다면 그가 이전까지 살고 있던 세상은 죽음이 가득한 시체와 같은 세상으로 보이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112. 예수가 말하기를, "부끄러울지어다. 영혼에 매달린 육체여! 2 부끄러울지어다. 육체에 매달린 영혼이여!."

해석 - 112절은 표현을 달리 한 또 다른 29절이다.

112절은 말 그대로 영혼과 육체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써 종국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영혼이 육신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단지 영혼과 육체가 단지 서로 붙어 있는 상태로만 놔두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의미다.

 

113. 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언제 나라가 오리이까?"

(예수가 말하기를,) "나라는 너희들이 그것을 쳐다보려고 지켜보고 있는, 그런 방식으로 결코 오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 있다!' '보아라, 저기 있다!' 아무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 위에 깔려 있느니라.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니라."

 

해석 - 113절은 대표적으로 3절, 51절 등 도마복음 전체를 통하여 예수가 계속 '아버지' 혹은 '나라'라는 표현을 통하여 강조하고 있는 부분의 의미를 또 다른 표현을 통하여 드러낸 구절이라 할 수 있다.

113절에서 예수는 나라(천국)는 죽음 이후에 보게 되거나 갈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13절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는 사도들을 신봉하는 기독교를 지난 2,000년 동안 지탱해 왔던 것들이 얼마나 허왕된 것인가를 입증하는 중요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114.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가로되, "마리아는 우리를 떠나야 한다. 여자는 생명에 합당치 아니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말하기를, "보라! 내가 마리아를 인도하여 그녀 스스로 남성이 되도록 만드리라. 그리하여 그녀도 너희 남성들을 닮은 살아있는 정기(精氣)가 되도록 하리라. 어떠한 여인이라도 자신을 남성으로 만드는 모든 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니라."

 

해석 - 114절은 22절과 연결되고 있는 구절로써 22절 중에서도 특별히 남녀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다.

114절에서 예수가 언급하고 있는 '남성'은 앞뒤 문맥상 단순히 여성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남성이 아닌 차별받지 않는 것이 당연한 대상으로서의 남성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114절의 예수는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여부를 구분함에 있어 신체적 구조를 통해서 결정짓지 않고, 정기(기상)가 살아 있는가 여부(여자라도 자신을 남자와 똑같은 존재로 인식하는가 여부)에 관점을 두고 있다.

즉, 정기가 살아 있는 사람은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나 56절과 80절에 등장했던 시체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는 보고 있다. 여기에서의 나라는 성경에 등장하는 그러한 의미의 천국이 아니다.

 

도마복음 해석을 마치며-

어째서 도마복음에 등장하는 '나라'가 성경에 등장하는 '천국'과 같지 아니한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도올 선생이 도마복음 강의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예수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바울이 사실상 만든 것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는 이러한 기독교는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 자체를 믿은 종교가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christ, 기름 부은 자, 유다 왕, 메시아, 구세주)라 신봉하는 사도들을 존중하는 사람들의 종교였다는데 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예수를 유다 왕이라 믿었던 사도들은 기독교를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하여 예수를 신격화해야 했을 것이며, 그러한 필요성을 필체로 구체화시킨 것들의 모음이 현재의 성경이라고 보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지난 2천 년 동안 기독교를 종교로 선택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운동'(나라운동)을 펼쳤던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아닌 예수 사후에 예수를 신격화하고 복음장사를 하고 다녔던 사도들을 믿고 있었던 것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도마복음 1차 해설을 마치며 종교와 신에 대하여 새롭게 느끼게 된 점을 요약하면...

"종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성공한 사기극이며, 신은 인류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큰 사기극의 도구다."

"신을 이용한 종교의 사기극이 가능한 것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진리가 깨질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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